[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이야기 한 포대로 남은 할머니

  • 입력 2008년 11월 15일 02시 58분


‘남도, 모든 길이 노래더라’ 그림=김선두, 아지북스
‘남도, 모든 길이 노래더라’ 그림=김선두, 아지북스
할머니의 가슴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습니다. 옷장 속에 사계절의 의상을 몽땅 진열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입듯이 할머니는 그 많은 이야기를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실 꾸러미 풀 듯 후손에게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할머니는, 군대에 간 아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던 적이 있었더랍니다. 그때 눈이 펑펑 내려 쌓이는 날이나 억수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이나 꼬박꼬박 아들의 편지를 전달했었던 집배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들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을 핑계 삼아 집배원을 기다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할머니 평생에서 겪은 유일한 짝사랑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젊었던 시절, 남편이었던 젊은 할아버지는 자전거 한 대가 전 재산 목록 1호였던 바람둥이였다고 합니다. 남편이 읍내의 주막집 여자와 눈이 맞아 먼 객지로 야반도주해서 소식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할머니는 젖먹이를 등에 업고 4년 동안이나 혼자서 농사를 지어야 했었답니다.

군대에 갔다 온 아들이 딱 1년 동안 농사짓기를 건성으로 거드는 척하더니 어느 날 새벽,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와 함께 찌그러진 장롱 속에 몰래 감추어 두었던 돈도 함께 없어졌으나, 돈이 있던 장소를 아들이 알고 있었음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10년 동안 기르던 개를 개장수에게 팔고 나서 한 달이 넘게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꿈속에서 그 개에게 물려 다리에 상처를 남긴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꿈속의 개에게 물린 자국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할머니의 말씀이 너무나 진지해서 따져 묻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할머니의 이야기는 날이 거듭될수록 비현실적으로 기울어졌으므로 아이들도 이제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질 정도로 무궁무진했지만, 이제는 들어줄 손자 손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바람에 떨고 있는 문풍지를 바라보며 젖먹이가 옹알이하듯 혼자 중얼거리다가 운명하였습니다. 도회지로 흩어져 살던 아들들이 허둥지둥 모여들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 그때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를 매장하기 위해 시신을 수습하려는 순간, 할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뼛속까지 새까맣게 타 들어간 숯 한 포대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태어나서 운명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일은, 많은 이야기와 한 포대의 검정 숯을 남기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김주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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