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양이 본질은 아니라는 거, 안다. 여자가 여자를 지적하면 곱으로 욕먹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코트에 눈이 머문 순간, 심사가 뒤틀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브라질 도착 때 화사한 분홍 코트 사진은 거의 절망스러웠다.
보수나 진보나 “혈세는 눈먼 돈”
정치인도 아닌 대통령 부인의 옷차림이 정치적 메시지를 발산할 리 없다. 그러나 그 동네의 정치적 분위기는 반영한다고 본다. 패션계에서 ‘헵번류의 복고적 여배우풍’으로 분류한다는 대통령 부인의 차림새는 머리카락 끝을 살짝 말아 올린 재키풍 헤어스타일과 함께, 국민과 동떨어진 상류사회 이미지를 발산한다. 경제 살리기를 한다면서 종합부동산세 감세에나 매달리는 이명박 정부와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적자생존의 논리는 정치나 이념, 제도에도 유효하다. 예순을 넘겨서도 젊고 도발적인 시집을 낸 한 시인은 “세상 변화에 뒤처지지 않게 죽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그 분야가 아예 없어진다”고까지 했다.
퍼스트레이디의 세련된 패션이 국민의 자부심과 국격을 높이는 건 여유가 있을 때의 얘기다. 종부세를 고치는 게 중요했던 때 역시 그래도 살 만했던 작년까지였다.
상황은 달라졌다. 지금처럼 경제성장률 1%대까지 내다보는 현실에선 세금은 ‘가진 사람’이 더 낼 수밖에 없다. 양극화 논쟁을 일으켜 증오를 정권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도 옳지 않지만, 가뜩이나 어려울 때 종부세를 폐지하고 고루 나눠 내자는 재산세 개편설 역시 합당하다고 할 수 없다.
‘작은 정부’를 내세웠던 이 정부가 경제난국을 만나 재정지출로 경기부양에 나서야 할 사정이 된 것도 이해한다. 그렇다고 지난해 성과가 미흡했던 사업 중 32%의 내년 예산을 기다렸다는 듯 되레 늘리거나 ‘10% 이상 삭감’ 지침을 지키지 않은 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심지어 국회는 예산안 상임위원회 심사를 하면서 규모를 늘리기까지 했다. 대통령 보좌를 결코 잘한다고 볼 수 없는 비서동 신축 경비로 50억 원, 대통령이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특수활동비로 20억 원을 증액했다. 여(與)나 야(野)나, 보수나 진보나 국민 세금을 제 돈처럼 쓰는 사람들의 눈엔 혈세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다.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았다고 아무리 외치고 싶어도 글로벌 위기는 세상을 바꿔놓고 있다. 좌파든, 우파든 정부는 경제성장에 온 힘을 기울이되, 세계화의 혜택과 리스크를 고루 나눠야 한다는 데 세계의 공감대가 모아지는 추세다. 안 그러면 세계화 자체가, 시장경제가, 심지어 민주주의가 뒤집힐 판이다. 버락 오바마의 미 대선 승리가 이를 방증한다.
평소 평등보다 자유를 강조해온 우파가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이 불안하다. 정권을 잃은 지 11년 된 영국 보수당은 42세의 젊은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 아래 빈곤 해소와 복지, 환경 문제 해결을 내걸고 “이젠 보수당이 진짜 진보”라며 세를 얻고 있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유럽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뽑은 핀란드의 이르키 카타이넨(37) 역시 중도우파다. 글로벌 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감세와 흑자재정에 동시 성공해 스타 리더로 떠올랐다. 사회안전망과 복지서비스는 탄탄하게 유지하되 일을 해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스마트한 정부운영 덕이다.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한 나라의 운명을 떠맡은 정부라면, 요즘처럼 비상한 시기엔 국민이 가장 절절해하는 부분에 공력을 집중해야 하는 게 내가 아는 상식이다. 당장 종부세 감면이나 비서동 신축이 절실하다고는 ‘로마의 휴일’ 속 헵번 공주 아니곤 말하기 힘들다.
11개월 전 현 대통령을 찍었던 적지 않은 사람이 정적들과 만나고 적진의 인재를 끌어들이는 남의 나라 오바마를 눈물나게 부러워하고 있다. 대통령은 남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대로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국민이 납득할 만한 국정쇄신을 해야만 한다. 정말로 우리가 달력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대통령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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