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렇진 않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남북전쟁 중이던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1863년 1월 1일)을 하기 넉 달 전, 신문사 편집장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서다.
“노예해방을 안 해야 유니언(미합중국 연방정부)을 지킬 수 있다면 난 노예해방 안 합니다. 노예해방을 해야 유니언을 지킬 수 있다면 난 노예해방을 할 겁니다. 반만 해방해야 유니언을 지킬 수 있다면 난 또 그렇게 하겠습니다.”
규제개혁·減稅가 옳다
미국의 리버럴 잡지 더 네이션은 이를 링컨의 위대한 실용주의로 평가했다. 일을 되게 하는 것이 실용주의다. 링컨은 노예제도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믿었지만 더 중요한 일을 되게 하기 위해선 노예제 폐지를 포기할 수도 있었다. 자유와 평등의 신성불가침 같은 가치보다 중요한 건 연방정부였고, 노예해방은 이를 지키려 택한 실용적 수단이었다.
어느새 가물가물해진 용어지만 이명박 정부도 ‘실용정부’로 불릴 뻔한 시절이 있었다. 괜히 새 정부 앞에 ‘참여’니, ‘국민’이니 하는 수식어는 붙이지 말자고 했을 만큼 이 대통령은 너무나 실용적이었다.
1년 전 오늘 당선된 이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경제 살리기다. 그까짓 경제보다 인간다운 삶이 훨씬 중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다수 국민이 합의한 국정 방향은 분명 잘사는 나라였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글로벌 경제위기를 절호의 성장 기회로 전환시킬 사명이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사람, 내 형님, 내 지지층을 배반하고 때로는 이념도 외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이 정부가 한때 자부했고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실용주의다.
다행히도 이 대통령이 추진해 온 규제개혁과 감세, 교육개혁은 경제를 살려내는 데 꼭 해야 할 정책이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엊그제 우리나라 경제보고서에서 다시 확인한 내용이므로 믿어도 된다.
생산과 노동시장 유연성을 통한 생산성 높이기, 경쟁을 통한 경쟁력 키우기 등은 선진국이 선진국 될 수 있게 해준 신자유주의적 해법이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지금도 유효하다. 이게 “부자만을 위한 정책”이라는 자칭 진보세력의 주장은 “미국 소는 광우병 소”와 다름없는 사기성 거짓말이다.
그러나 “개혁에 성공하면 재선(재집권)엔 실패한다”는 말이 선진국에도 있다. 문제를 도려내고 새살이 돋을 때까진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다. 게다가 지난 정부에서 ‘거꾸로 정책’으로 우리의 선진국 진입을 막아 온 말로만 진보세력은 1년 내내 새 정부의 발목만 잡다 급기야 국회 문짝까지 박살을 냈다.
지난 1년은 억울하게 놓쳤지만 시간을 더 허비하면 글로벌 위기에서 벗어날 가망이 없다. 유럽위원회의 경제보고서에 따르면 개혁에 성공하고도 재선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금융시장 호황기 때 개혁하거나 사회안전망 확충과 함께 개혁하는 거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금융감독과 금산분리정책엔 신중하되 사회안전망 확충에 힘쓰라는 OECD의 제안과도 들어맞는다.
내 사람, 내 이념을 배반하라
‘부자내각’으로 단단히 찍힌 이 정부가 성공하는 길 역시 잘 설계된 사회안전망과 함께 가는 경제 개혁밖에는 없다. ‘이념법안이 아니라 질서를 살리는 법’이라는 이 대통령의 말이 맞는다 해도 국민이 이념법안이라고 ‘인식’하면 이념법안이고, 여기서 승강이할 시간은 없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적과 손을 잡은들 어떤가.
경제가 살아나면 이념은 자연히 돌아온다. 안 돌아서도 본인 선택이고 설령 그렇더라도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막을 일은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우리에겐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가 더 무섭다.
대선 승리부터 사실상의 이명박 정부는 시작됐다. 현 정부가 예뻐서가 아니라 현 정부가 성공해야만 내 자식이 잘살 수 있다. 오늘은 임기 4년의 ‘실용정부’가 출범하는 첫날이어야 한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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