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기적의 역사’를 보는 두 개의 안경

  • 입력 2008년 12월 19일 20시 01분


미주개발은행(IDB)의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스 박사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워싱턴에 있는 IDB에서 20년가량 근무했다. 그는 중미 카리브해 경제인협회(회장 김종건)가 주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방한했다. 서울에 처음 와 본 그의 부인은 한국의 첨단 정보기술(IT) 문화에 놀라움을 연발했다.

부인은 외국에 갈 때마다 박물관을 찾는다고 했다. 유럽 박물관의 안내기(案內機)는 전시물에 붙은 번호를 관람객이 눌러야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수동인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모바일 안내기를 목에 걸고 걸어가면 자동으로 유물을 인식해 영어로 설명이 나온다며 감탄했다.

택시를 타고서는 더 놀랐다. GPS와 DMB, 호출(콜) 기능을 통합한 내비게이션에다 크레디트카드 단말기를 갖추고 있었다. 운전사는 휴대전화로 무료 통역(피커폰)을 연결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외국인 승객과 목적지나 요금에 관해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부인은 자신이 쓰는 삼성 휴대전화를 내게 보여주며 “한국의 IT 문화가 인터넷을 발명한 미국보다 더 발전돼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부인은 남편의 한글 무늬 넥타이를 가리키며 “한글은 참 신기한 문자”라고 말했다. 부인은 전통문화의 거리인 서울 인사동을 구경하고, 외관이 멋진 삼성증권 빌딩 꼭대기 층에서 식사를 하고, 롯데백화점에 들렀던 이야기를 신이 나서 늘어놓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작은 나라”에 대한 인상이 강렬한 것 같았다.

외국인이 놀란 첨단 IT 문화

부인은 “미국 명문 고교와 대학에 가 보면 한국학생들이 우등생 대열에 반드시 포함돼 있다”면서 “재미 한국인은 힘들게 돈을 벌어 자녀 교육에 아낌없이 쓴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남편이 끼어들어 “그것은 이민자 사회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토를 달았다. 부인이 “남미 이민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자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박사도 입을 다물었다. 남편은 우루과이 국적이다. 나는 “한국인의 DNA에 가까운 교육열이 경제 기적을 이루는 밑받침이 됐다”고 거들었다.

부인은 나와 동갑이었는데 생일이 몇 달 빨랐다. 나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국의 베이비 부머에 관한 설명을 곁들였다. “우리는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을 아버지로 두었다. 우리 세대는 적빈(赤貧)의 나라가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과정을 죽 지켜보았다.”

전후(戰後) 베이비 붐 세대인 나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만든 현대사 교육 보조교재 ‘기적의 역사’ DVD를 시청하면서 추억의 앨범을 들추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 가난했던 시절 서독으로 떠나는 간호사와 광원, 베트남 파병 군인들은 우리의 누나이고 형이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모래벌판에 포항제철과 현대중공업을 건설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가슴 뭉클했다.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정통성이 취약하다거나,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부끄러운 역사라고 주장하는 친북좌파의 역사관이 중고교 교단을 풍미했다. 교과부가 좌(左)편향의 현대사 교과서를 수정하고, ‘기적의 역사’와 같은 멀티미디어 교재를 보급하는 것은 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건국 60년사에서 부끄러운 대목도 많았지만 우리는 후진성을 짧은 기간에 극복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으며 이제는 정보화에서 세계 첨단을 달려 외국인들도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기적의 역사’ DVD는 ‘대한뉴스’를 주로 편집한 탓에 또 다른 편향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80년대 자료는 그 시절 텔레비전만 켜면 나오던 ‘땡전(全) 뉴스’와 다를 바 없었다. 전두환 씨가 자행한 군사반란, 광주학살, 헌법과 기본권 유린, 천문학적인 뇌물수수에 대해서는 어느 구석에서도 언급이 없었다.

“좌편향도 우편향도 극복 대상”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광화문 문화포럼’(회장 남시욱) 특강에서 “한국인의 역사의식은 극단적인 좌우 이념의 안경을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좌파는 계급투쟁과 민주화만 강조하고 북한에 지나치게 우호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일부 뉴라이트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전통문화와 도덕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일제강점기의 경제발전을 강조한 나머지 일본 극우세력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한 교수는 “좌파든 우파든 역사 해석에 지나치게 이념을 투입하면 역사의 진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고 말했다.

부끄러운 장면을 삭제하거나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서술이 아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어두운 부분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를 자랑스럽게 극복했다. 후세대가 올바른 미래 비전을 설정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시각에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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