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민]역적과 영웅 사이

  • 입력 2008년 12월 27일 02시 59분


양제해 모변사건은 1813년 제주에서 일어났다. 제주도 자치 국가 건설을 꿈꾸다 미수에 그친 역모 사건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다 그렇게 나와 있다. 다산의 제자 이강회가 쓴 ‘상찬계시말(相贊契始末)’이란 책을 읽어 보니 실상이 영 딴판이었다. 양제해는 제주도 아전들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던 인물이었다. 아전의 상찬계 조직은 그로 인해 자신들의 비리가 드러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거꾸로 양제해를 무고하여 역모로 뒤집어씌워 그를 죽임으로써 입을 막아 버렸다. 진실은 지난 200년 동안 왜곡된 채로 묻혀 잊혀졌다.

최근 자료를 뒤져 보니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죽었던 그는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이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제주도 별국 건설을 시도했던 민중 영웅으로 윤색되고 있었다. 역적으로 내몰아 죽여 놓고 이제는 민중의 영웅이라니, 이래저래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상찬계시말’은 일본 교토대 가와이(河合)문고 수장고 속에 오래 잠들어 있다가 최근에야 공개되었다.

자료를 읽는데 자꾸 양제해의 한 서린 절규가 환청처럼 들렸다. 피투성이의 얼굴에 원통한 눈빛이 형형했다. 저자 이강회는 당시 흑산도로 유배와 있던 이 사건 관련자를 인터뷰하다가 분개하여 왜곡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겼다. 글에서는 그의 가쁜 호흡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해원(解寃)의 심정으로 관변 기록과 대비하여 이 사건의 시말을 밝힌 논문을 썼다.

막상 이강회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그동안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관변 자료 속의 증언과 심문을 검토해 보니 앞뒤가 맞지 않고 허술한 내용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는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민란이 숱하게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 가운데 지방관이 자신의 가혹한 수탈과 학정을 호도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뒤집어씌운 역모 사건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지난 군사정권 시대의 간첩단 사건처럼 말이다.

수십 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그때는 세월이 험해서 그렇게 됐으니 미안하다고 하면 그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는가. 사고를 위장해 정적의 목숨을 빼앗고서 관련자의 입을 막았던 사건도 세월이 바뀌자 실체가 드러나기도 한다. 막상 그 실체라는 것도 조사의 주체나 의도에 따라 실상이 뒤바뀌기 일쑤다.

진실과 화해를 내세웠던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이 정권의 향배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양새다. 한쪽에서 의혹설을 제기하면 다른 편에선 음모론으로 맞선다. 말이 서로 엉기니 일반 국민이야 무엇이 진실이고 어디까지 사실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진상을 규명하자는 일이 갈등의 골을 더 깊게 만들기도 하고 더 치열한 공방을 낳기도 한다.

대체로 진정한 화해의 모양새로 가기보다 겨우 아문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하고 덮고 가자는 주장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역사의 거울을 더 투명하게 닦아야 할 책무가 있다. 또 이런 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큰 진전이 아닌가.

불과 몇십 년 전, 누구나 목도했던 사실을 두고도 진실 공방이 끝이 없다. 200년 전 양제해 사건 같은 경우는 이강회의 우연한 기록마저 없었던들 재론의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사실만 있지 진실은 애초에 없었는지 모른다. 한 가지 사실이 서로 다른 진실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세상의 수많은 양제해의 절규를 못 들은 체 외면하는 자세는 더 큰 죄악이다. 사실과 진실의 사이, 이 엇갈림에 대한 생각이 요즘 들어 자꾸 깊어진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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