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위기 이후의 삶

  • 입력 2008년 12월 31일 02시 59분


양극화가 극심했던 대공황 이전 미국 상류층의 삶은 1925년 출간된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잘 나타나 있다. 동부 롱아일랜드의 상류층은 프랑스 루아르 강변의 고성(古城)을 본떠 지은 대저택에서 파티와 술, 여자에 파묻혀 지내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작가인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대공황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물질문명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던 개츠비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은 조만간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갈 재앙의 전조였던 것 같다.

자만과 탐욕이 위기의 주범

금융위기의 주범인 월가 금융전문가들의 생활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구제금융을 요청하러 오면서도 자가용 비행기를 이용한 빅3 최고경영자(CEO)도 처음엔 자신들의 행위가 왜 비난받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미국인은 올해 지난 몇 년간의 번영이 주택시장의 거품에서 비롯됐음을 처절하게 경험했다. 사람들은 환상에 빠져 있었다. 집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나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대가(代價)를 치르고 있다.

투자전문가나 학자들은 이번 위기가 언제쯤 극복될 것이라는 나름의 전망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이들의 말대로 경기는 바닥을 찍은 뒤 언젠간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기가 아니라 그 이후 삶의 방식이라고 본다. 폴 크루그먼이 지난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또 다른 거품으로 과거의 번영을 추구하려는 향수에 대해 강력히 경고했듯 은행에서 대출받아 집을 사고, 집값 상승을 기대하며 미리 새 자동차를 사는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해 우리 경제는 일기예보에 없는 풍랑을 만난 난파선 같은 처지였다. 1997년 외환위기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우리의 잘못에서 기인했다지만 이번엔 우리와 상관없는 미국발(發) 금융위기로부터 왔다는 점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은 정말 없는가. 미국이건 한국이건 모든 위기의 출발은 똑같다고 본다. 자만과 탐욕,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987년 블랙먼데이부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0년 인터넷 거품의 붕괴 그리고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까지 일련의 금융위기를 분석한 ‘패닉 이후’의 편저자 마이클 루이스는 올해 금융위기는 파장이 선진국부터 개도국까지, 상류층부터 빈곤층까지 고루 미쳤다는 점에서 가장 ‘평등한’ 위기라고 평가했다. 속 뒤집히는 얘기이지만 맞는 말이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위기는 우리에게 교훈을 남긴다. 외환위기는 펀더멘털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할 것인가. 앞으로 각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고 나는 본다.

이는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적용되는 얘기다. 크루그먼은 버락 오바마 정부가 경계해야 할 새로운 거품으로 환경과 에너지산업을 들고 있다. 우리 정부도 녹색산업에서 신성장동력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는 방식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녹색산업도 또 다른 거품이 돼버릴 수 있다.

버블로 돌아갈 순 없다

2008년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을 뜯어내는 마음이 가볍지 않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 기업 개인 모두가 위기 이후의 생활방식에 대한 비전이 없는 것처럼 보여서다. 죽어라고 고생해 이 위기를 극복한다 해도 에너지 낭비와 거품이 가득한 생활이라면 또 다른 위기를 맞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죽음에 직면할 정도의 큰 병을 앓아본 환자는 치유 이후 생활방식을 바꾼다. 금융위기도 마찬가지다. 위기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고민이 있어야 지속가능한 해법도 나올 게 아니겠는가.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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