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테크노 스릴러

  • 입력 2009년 1월 6일 03시 00분


미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선 테크노스릴러(technology thriller)가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이 분야의 소설이 인기다. 의학이면 의학, 법률이면 법률 등 특정 분야의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플롯 자체가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반전이 거듭되는 구조여서 결말을 쉽게 짐작할 수 없어 독자는 소설 속의 인물들과 끝없는 두뇌 대결을 벌여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 소재로는 이만한 장르도 없다.

▷테크노스릴러를 쓰려면 전문가들도 탄복할 정도의 뛰어난 전문지식과 소설 구성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스티븐 킹 같은 예외가 있긴 해도 그 분야 전문가가 전업(轉業)해 작가가 된 경우가 많다. ‘돌연변이’ ‘코마’ 등 의학 스릴러를 개척한 로빈 쿡과 ‘쥐라기공원’ ‘먹이’의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모두 하버드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 출신이다. ‘펠리컨 브리프’ ‘레인메이커’ ‘의뢰인’을 쓴 존 그리셤은 변호사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이 장르의 인기가 만만치 않다. 스티븐 킹, 댄 브라운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CSI 과학수사대’나 ‘하우스’ 등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자란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한국적 상황과 눈높이에 맞는 테크노스릴러는 좀처럼 만나보기 어렵다. 과학이나 미래를 소재로 하는 건 더욱 그렇다. 미국처럼 전문가가 작가로 전업하는 일이 없고, 작가들은 테크노스릴러를 쓸 만큼의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이 분야를 ‘통속적’이라며 기피하는 탓도 있다.

▷‘불멸의 이순신’의 작가 김탁환 KAIST 교수와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의 저자 정재승 KAIST 교수가 본격적 테크노스릴러를 표방한 작품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존 그리셤과 마이클 크라이튼을 통해 소설 쓰는 법을 배웠다고 밝힐 정도로 이 분야의 마니아다. 정 교수는 뇌과학과 로봇 등 과학소재로 존재의 의미를 묻겠다고 한다. 작품 제목은 창조론을 논박한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의 책 제목 ‘눈먼 시계공’을 그대로 차용했다. 과학자와 작가가 함께 그려낼 상상력의 변주(變奏)로 아침 신문을 읽는 기쁨이 하나 더 늘어날 것 같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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