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염원하면 통한다. 이것은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도 갖는 신념이다. 간절히 염원한다는 것은 돼도 안 돼도 고만이 아니라 반드시 돼야 한다고 염원한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그 염원이 이뤄지기 전엔 거기에서 해방될 수가 없다. 어떤 이에 대한 사랑도 혹은 어떤 일에 대한 기획도 그런 염원일 수 있다.
오래오래, 일이 성사되도록 참으로 오래 염원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정하기 때문이다. 옳고 바른 염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버릴 수가 없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사사로운 염원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 서찰이 아니라 공개적인 지면에 쓰는 이 글에서는 마땅히 나를 넘어선 우리의 염원을 얘기해야 옳다. 우리의 염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들 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는가? 나는 얼른 대답할 수 없다. 통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통일된 겨레와 나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간절히 염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도 잘 모른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소원이지 우리의 소원은 아니다. 하물며 우리의 간절한 염원은 아니다.
한반도 평화 위해 북핵 해결되길
우리의 간절한 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반도의 통일보다도 한반도의 평화다. 나는 내 아둔한 머리로도 한반도의 평화가 1차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 없다. 적극적, 긍정적인 차원에서 평화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점은 쉽게 말 못한다 하더라도 소극적, 부정적인 차원에서 평화는 저런 것일 수가 없다는 점쯤은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 어떤 명분의 전쟁도 (통일을 위한 전쟁도, 정의의 전쟁도)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고 반대한다. 전쟁은 그럴싸한 명분이 있는 경우, 또는 그보다도 힘의 균형이 깨져 한쪽이 압도적인 우위에 섰을 경우 일어날 위험성이 커진다. 우리의 염원인 평화가 튼실한 것이 되기 위해선 남북한 사이에 갑자기 힘의 균형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렇기에 북한의 핵 문제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선 반드시 해결해야 될 최우선 과제다.
평화에 이어 우리의 간절한 염원은 무엇인가. 북쪽 동포가 당장 남쪽 동포와 똑같이 호의호식은 못한다 해도 최소한 굶주리다 죽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1945년 광복 이후 우연히 남북으로 갈라져 살게 됐다. 우리가 잘나서 이쪽에 사는 것이 아니요, 북녘 동포가 못나서 저쪽에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남쪽에는 목숨을 걸고 분단의 사선을 넘어 월남해 온 용감한 사람들도 있다. 근래에는 탈북한 새터민의 수가 매년 2000명을 웃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선택이나 자유의사가 아니라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서 북한주민이 되고 남한주민이 됐다. 그러한 남북한 동포의 삶이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는 현실은 좋지 않다. 모른 체해서는 안 될 일이다.
통일이란 궁극적으로 남북한에 실재하고 남북한을 현실적으로 통치하는 두 권력체계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얘기다. 그건 어려운 일이요, 가까운 장래에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두 권력체계가 하나로 합치진 못하더라도 갈라져 사는 남북의 핏줄은 통일의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 서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주민 기아 벗고 이산상봉을
거추장스러운 의전을 챙기며 남북의 정상이 떠들썩하게 만나도 한반도의 평화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북녘 동포의 복지에도 별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런 정상의 만남보다 남북의 이름 없는 이산가족부터 더 늙기 전에, 또 더 늦기 전에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햇볕정책이든 포용정책이든 모든 대북정책의 성패를 나는 이 세 가지 염원―한반도의 평화, 북한주민의 복지, 남북한 이산가족의 만남의 성사 여부에 따라 평가하련다. 올해는 그러한 염원의 성취에 진일보하는 해가 되어주소서.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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