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르침 주기위해 칭찬
“…일본인은 제일 예의 바르고 친절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손님을 대하는 친절은 최상의 것이며 일본인 마음의 아름다움을 잘 비춰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중략) 그러나 국가로서의 일본을 볼 때 경제대국의 강력한 이미지는 있으나 예의바르고 친절한 일본이라고는 여간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일본보다 뒤떨어져 보인다고 생각되는 나라들에 대한 태도에는 때때로 과거 군국시대를 생각나게 하는 일조차 있습니다. 나는 일본인의 친절한 아름다운 마음과 그에 반대되는 국가 태도 사이의 갭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알지 못합니다.”(Sophians Now, 1988년)
중간에 생략한 부분을 살린다면 위 글의 4분의 3이 일본인에 대한 칭찬이다. 한 마디 핀잔, 하나의 가르침을 주기 위해선 먼저 세 배 네 배의 칭찬을 해주라는 전범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런 사연이 있은 후 광복 50주년 기념 대담을 김수환 추기경과 갖도록 동아일보사에서 주선해 주어, 1995년 8월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추기경의 대일관을 여쭈어 보았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가 강제로 일본 군가를 부를 때마다 우리에게는 젊음을 바칠 만한 조국이 없는 게 마음에 사무쳤다는 얘기, 일제강점기 때 동포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걸 보며 갖게 된 적개심이 성직자가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아 하느님께 원수를 미워하지 않도록 기도드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추기경 속 사람내 물씬 풍기는 인간 김수환을 본 듯 반가움 같은 걸 느꼈다.
추기경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이런 일화도 있다. 수많은 언어에 숙달한 추기경께 도대체 몇 가지 말을 하시느냐 묻자 대답하시더란 얘기다. 한국 사람이니 한국말은 하고 일제 치하에서 일본말도 해야 했고 학교에서 영어는 배웠고 독일 유학을 해서 독일어도 좀 하고 성직자라 라틴말도 안 할 수 없고 교황청이 있는 곳에 자주 여행하니 이탈리아 말도 좀 하고 그러고 거짓말도 좀 하고….
실제로 내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뵌 일은 한 번밖엔 없다. 그런데도 나는 지난 40년 동안 언제나 김수환 추기경의 존재를 느끼며 살아왔다. 과거에 대통령 박정희의 존재가 그랬던 것처럼.
원근 친소(親疎)를 초월하고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아우르는 두 권위, 정신의 세계와 권력의 세계는 우리의 옛날엔 크게 갈라지지 않고 있었다. 선비가 벼슬을 했고 권력을 추구하려면 학문을 해서 과거를 치러야 했던 조선조 시대에는 유럽의 역사처럼 왕권과 교권의 대립이란 없었다. 정신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의 대립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과 군부 출신 대통령들 사이의 갈등은 비로소 우리에게도 정신의 세계와 권력의 세계, 교회와 국가의 싸움을 현실로 체험케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싸움이 지속되던 긴 연대 동안 종파나 종교를 초월해서,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를 아울러 권력의 세계에 맞서는 정신의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통령의 죽음은 그 권력의 끝이다. 그러나 성직자의 죽음은 정신의 끝이 아니라 그의 부활의 기적을 낳고 있다. 추기경은 그의 선종으로 비단 그의 각막만이 아니라 더욱 많은 것을 훨씬 많은 사람에게 선물해 주고 있다. 사람이란 호의호식하고 벼슬자리를 탐내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선물해 주고 있다. 명동성당으로 새벽부터 몰려가는 인파는 이 깨달음의 기적을 간증해 주는 것만 같다.
인간다운 인간의 길 몸소 실천
인간이란 본시 인간 이상의 무엇인가를 지향함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 이 지상 세계는 그를 초월하는 더 높은 세계를 지향함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살 만한 살가운 세상이 된다. 그렇기에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현재가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미래라는 것, 인간은 곧 인간의 미래라는 것, 그것을 깨우쳐 줌으로써 추기경의 죽음은 우리에게 바로 우리의 ‘미래’를 선물해 주고 있는 것만 같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