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권순활]이리 떼

  • 입력 2009년 2월 20일 02시 56분


한국 기업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괘씸죄’라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압축적 고도성장 과정에서 이런저런 약점을 지닌 기업들이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면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도 있어 나온 말이다. 기업 비리(非理)에 대한 표적 징벌은 권력이 재계를 통제하는 손쉬운 수단이었다. 실제로 역대 정권과의 친소(親疏) 관계에 따라 특혜나 불이익을 받은 기업이 적지 않았다.

▷1985년 전두환 정권은 당시 재계 서열 7위이던 국제그룹을 전격 해체했다. 공식적으로는 무리한 사업 확장 등에 따른 경영 부실 때문이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일해재단 모금에 적극 호응하지 않은 데다 대통령이 소집한 주요 그룹 총수 회동에 지각해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1993년 헌법재판소는 국제그룹 해체가 위헌(違憲)이라는 취지의 결정을 내려 전 정권의 조치가 초법적 결정이었음을 분명히 했지만 국제그룹이 원상회복될 수는 없었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1999년 해체된 신동아그룹의 최순영 전 회장이 최근 한 월간지와 인터뷰하면서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핵심 인사가 와서 ‘최소한 1992년 김영삼 후보에게 준 돈 이상을 달라’고 했으나 주지 않아 정치적 보복을 당했다”면서 “김대중 정권 실세(實勢)들이 이리 떼처럼 달려들어 20조 원짜리 회사를 뜯어먹었다”고 주장했다. 최 전 회장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동교동계 실세들로 구성된 9인의 비선(秘線)조직 모임이 신동아그룹을 ‘손보기’로 지목했다”면서 “이 비선조직의 실체는 아태재단 핵심인사를 통해 들었다”고 덧붙였다.

▷최 전 회장의 폭로가 실체적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판단하기는 이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가 구속되고 회사가 공중분해됐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만약 신동아그룹의 해체 결정에 정권 차원의 정략적 판단이 개입됐다면 개인적 혐의와는 별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가 주장한 내용은 터무니없는 사실을 지어냈다고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권력과 기업 사이에 괘씸죄라는 말이 완전히 사어(死語)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의혹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이 불가피해 보인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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