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이나 3이 길수(吉數)라면 그에 반대되는 수가 아홉수인가 싶다. 29나 39처럼 남자 나이에 아홉수가 들면 결혼이나 이사를 꺼린다던가. 부인네들은 30대에서 40대로, 혹은 40대에서 50대로 넘어가면서 먹기 싫은 나이 대가 다가오는 39나 49, 아홉수가 든 해에 병치레를 자주 한다는 말도 듣는다.
여기서는 그러한 민간신앙, 미신과 상관없는 아홉수 얘기를 해보련다. 나는 젊은 학생들에게 20세기에 아홉수가 든 해를 곰곰이 살펴보면 한국과 독일의 현대사가 보인다고 말하곤 한다. 단순한 숫자의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해주면 역사의 연대를 쉽게 외울 수 있다.
먼저 독일의 20세기사에서 아홉수가 든 해는 독일뿐 아니라 때로는 전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1919년에는 카이저 독일의 제2제국이 몰락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한다. 1929년의 대공황은 경제 기반이 취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치명타를 입혀 히틀러의 제3제국으로 전락하는 제1공화국의 ‘종말의 시작’이 됐다. 1939년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 결과 전 유럽이 폐허가 되고 전후 세계에 미소라는 새로운 두 열강의 발언권이 결정적으로 강화된다. 1949년 동서독에는 두 개의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무너져
1959년에는 창당 100돌을 눈앞에 둔 서독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탈바꿈하는 바트고데스베르크 당 대회 강령을 채택한다. 그 결과 1969년, 불과 10년 후 사민당은 정권교체에 성공해서 빌리 브란트 내각을 탄생시켰다. 이해 가을 집권한 브란트는 종전의 독일 통일정책을 포기하고 동서독 양국체제의 안정과 교류를 촉진하는 동방정책을 과감히 추진한다. 그 결과 다시 불과 20년 만인 1989년, 분단독일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 통일의 길을 열어놓는다.
한편 아홉수가 든 한반도의 20세기 역사는 불행했던 그 전반기에 동북아시아의 하늘에 불을 뿜은 한국 민족주의의 거창한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먼저 1909년 늦가을에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침략주의 일본의 주모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함으로써 일제에 병탄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대한국인(大韓國人)의 기개를 만방에 떨쳤다.
10년 후인 1919년 3월 1일에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최대 규모의 집단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신문 방송과 같은 어떤 근대적 통신 수단도 갖지 못한 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1500여 회에 걸친 시위에 200여만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3·1운동은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중국의 5·4운동을 선구한 결과가 됐다.
다시 10년 후 1929년에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집단적 항일 시위로 전국에 번져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다. 시위 또는 동맹휴학에 동참한 학교 수가 194개교, 참가 학생 수가 5만4000명이니 당시로선 대단한 수이다. 그 뒤 아홉수가 든 한국의 20세기사는 반세기 후의 1979년이 유신독재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10·26사태로 클로즈업된다.
올해는 안중근 의거 100주년
어떤 수를 좋아하고 꺼리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라와 겨레의 존망에 큰 뜻을 갖는 해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나라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6·25전쟁 50주년을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허황된 통일의 환상의 거품을 일으켜 덮어씌워버렸다. 2005년 을사늑약 국치의 해에는 난데없이 한일 우호의 해가 선포됐다. 내년 2010년은 망국 100주년에 6·25전쟁의 갑년이 되는 해다. 이번엔 정부가 어떻게 넘길지 두고 보련다. 그에 앞서 올가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정부가 어떻게 기념할지부터.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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