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사이에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린 ‘막장 드라마’는 패륜 강간 강제낙태 같은 온갖 지독한 내용들을 거리낌 없이 토해놓고 있다. 그것도 가족이 함께 모이는 저녁 시간대에. 지상파 방송사들이 불경기 속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광고 수입을 높이려는 몸부림이다. 그래놓고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선과 악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악취 속에 공허한 미디어법 논쟁
한 번 방송했던 것을 다시 내보내는 재방송이 지난해 가을 경제위기 이후 크게 늘었다. 낮방송은 재방송으로 거의 채워지고 있다. 방송사들은 재방송을 내보내면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돈 안 들이고 시간을 때우는 전략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본 걸 또 볼 수밖에 없고 재탕 방송을 위해 TV 수상기가 빨아들이는 전기 낭비도 국가적으로 상당하다.
연예인들이 막말을 쏟아내는 예능 프로그램은 ‘광고가 많이 붙는다’는 이유로 확대된 반면에 ‘TV 책을 말하다’ 같은 고급 취향의 프로그램은 ‘손님이 없다’는 논리로 사정없이 폐지됐다. 방만한 인력은 손대지 않고 제작비를 삭감해 방송의 품질을 떨어뜨리고, 시청률 하나로 프로그램의 목숨을 결정하는 방송의 위기가 심각하다.
오늘부터 미디어 관계법 개정을 둘러싼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 산하에 설치된 ‘미디어발전위원회’가 본격 활동에 들어간다. 미디어법을 놓고 여론을 수렴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로서 여야 추천으로 각계 인사 20명이 참여하고 있다.
미디어법 개정을 반대해 온 진영에서는 ‘미디어 공공성’이란 단어를 부쩍 자주 입에 올린다. 신문 방송의 겸영이 허용되고 대기업이 방송에 참여하면 공공성이 무너진다는 논리로 공격에 나서고 있다. 이들이 만든 운동단체의 명칭과 구호에는 ‘공공성’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이번 ‘사회적 논의’에서 공공성을 이슈로 내세워 승리를 거두겠다는 계산이다.
여기에는 자신들은 ‘선(善)’이고 상대편은 ‘악(惡)’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자신들이 방송을 계속 독점해야 공공성이 보장되며 주요 신문이나 대기업이 방송에 진출하면 공공성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문 방송의 겸영이 허용되던 시절인 1970년대 신문이 겸영했던 동아방송(DBS)은 KBS와 MBC보다 훨씬 공공성 높은 방송을 했다. 이들 방송계의 터줏대감이 오히려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사실은 더는 거론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번 논쟁은 거창한 말의 성찬으로 진행될 공산이 크다. 언론 장악이 어떻고 방송의 정치적 독립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당장이라도 TV를 켜고 ‘막장 방송’을 시청해 보면 알 수 있다. 실제 프로그램에서는 악취가 풀풀 나고 있는데 하늘 위에 앉아서 아직 해보지도 않은 법과 제도에 대해 결과가 어떨 거라며 씨름하는 꼴이다. 공공성을 떠받드는 일부 언론 단체는 ‘막장 방송’에 대해서는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다.
품질 향상 역행하는 방송은 자격 없다
고품질 방송의 대명사인 영국의 BBC는 2007년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면서 대규모 인력 감축과 함께 ‘방송 품질에 초점을 맞춘다’는 개혁과제를 내놓았다. 일본 NHK의 하시모토 겐이치 전 회장은 “공영방송의 최대 과제는 방송의 품질”이라고 말했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BBC를 보는 영국 시청자처럼 시청료가 아깝지 않은 좋은 프로그램을 구경할 수 있는가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일이 더 현실적이고 중요하다. 방송을 이 지경으로 추락시킨 책임이 있는 지상파 관계자들은 공공성을 말할 자격이 없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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