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무지개 좇는 인생

  • 입력 2009년 3월 28일 02시 59분


어린 시절, 방학을 하면 가장 먼저 생활계획표를 만들었습니다. 컴퍼스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하루를 여러 칸으로 나누어 공부 독서 놀이 따위로 채워 넣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벽에 붙여두고 실천을 할라치면 어김없이 계획과 어긋나는 걸 경험하곤 했습니다. 포부와 계획은 원대하나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생활계획표는 일깨워 주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도 생활계획표는 우리를 따라다녔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누적될수록 포부와 계획은 줄어들고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실천 가능성을 높이는 잔꾀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생활계획표에 단 두 개의 칸만 만들어 두 시간은 ‘공부’, 나머지 스물두 시간은 ‘자유’로 구분하는 대범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친구는 두 시간 공부도 제대로 한 날이 드물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에는 생활계획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인생에 대한 목표와 희망이 생기고 그것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느라 하루 단위의 삶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활계획표 대신 인생계획표를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인생계획표에는 평생을 건 계획과 포부, 혼신의 힘을 다하는 노력 이외의 것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여가도 없고 휴식도 없었습니다. 오직 성취, 오직 실현, 오직 성공!

그렇게 달려 어떤 친구는 사장이 되고, 어떤 친구는 실직을 하고, 어떤 친구는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고, 어떤 친구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떤 친구는 이민을 가고, 어떤 친구는 병에 걸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계획표를 결산하기 전에 인생이 먼저 끝난다는 걸 알고 나서야 비로소 친구들은 알아차렸습니다. 거창한 계획과 원대한 포부에는 ‘생활’이 없다는 것. 인간에게 주어지는 생활은 오직 하루 단위로만 영위할 수 있다는 것.

거창한 인생계획표에는 쫓는 일과 쫓기는 일밖에 없습니다. 쫓는 자의 심성은 황량해지고 쫓기는 자의 심성은 불안해집니다. 무엇을 이루고자 했던가, 세월이 지나면 그토록 원대했던 포부가 허망한 무지개였음을 깨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갑부가 된 사람도,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자기 인생의 무지개를 보긴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에 만들던 하루 단위의 생활계획표를 다시 만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친지들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 그러고도 느리게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야겠습니다. 하루를 제대로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고,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하루를 제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활계획표, 그것은 인생의 축약도입니다.

박상우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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