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荒城)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3절로 이뤄진 노래가 애조를 띠고 퍼져나가자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발을 굴렀다. 노래는 입소문을 타면서 1932년 ‘황성의 적(跡)’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레코드로 취입됐다.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옛터’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로는 경이적인 5만 장의 레코드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니 반응이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일제가 ‘조선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노래를 금지했지만, 취입 당시 22세이던 이애리수는 ‘민족의 연인’으로 불리며 일약 스타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기 가수였다.
▷이 곡은 전수린 씨가 개성의 고려왕궁 터를 한밤중에 찾아가 얻은 착상(着想)으로 작곡했다. 폐허로 변해버린 왕궁 터에는 달빛만 무심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영화를 누렸던 옛날과 비교해 회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내린 비를 보며 악상이 떠올라 작곡을 했다”고 회고했다. 작사는 극작가와 배우로도 이름을 날렸던 왕평이 했다.
▷‘애리수’는 서양 이름인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9세 때부터 연극 무대에 섰던 그는 ‘황성옛터’ 이후 절정의 인기를 누리다 1930년대 중반 종적을 감췄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자살을 두 번 시도했다. 나이를 감안하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됐던 그가 경기도의 한 요양시설에서 살고 있음이 알려진 건 지난해였다. 그가 그제 99세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한을 달래줬던 스타 예술가를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에게서 대중문화 여명기의 생생한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못했던 것도 못내 아쉽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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