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기억이 없다면 매일 보는 가족의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의 저자인 네덜란드 심리학자 다우버 드라이스마는 “기억이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고 말한다. 정말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아련하게 사라져 아쉬움을 남기고,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장면은 세세하게 떠올라 불쾌한 감정을 촉발한다. 그럴 때면 좋은 기억만 남기고 나쁜 기억은 싹 지워버리는 약이라도 개발되었으면 싶다. 심리학자들은 나쁜 기억일수록 오래간다고 말한다.
▷기억을 부분적으로 지울 수 있는 마법 같은 약물이 개발되었다. 미국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의료센터 연구팀이 뇌 세포의 기억 작용을 촉진하거나 방해하는 효소를 이용해 기억을 지우거나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연구팀이 전기충격장치를 피해가는 방법을 익힌 쥐에게 ZIP라는 약물을 투여하자 쥐들은 충격장치를 피해가지 못했다. 충격장치가 있는 지역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은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 불과하지만 연구를 확장하면 인간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뇌에 ZIP를 투여하면 나쁜 기억에 따르는 불쾌감이나 공포심을 없앨 수 있다. 반대로 기억을 강화하는 약물을 투여해 기억상실 등을 치료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반대상황도 일어날 수 있다. 흉악범이 약물을 투여받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져 불쾌한 사건의 세세한 상황까지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것도 끔찍한 고문이다. ‘망각(忘却)은 신의 선물’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을 성싶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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