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복원과 저소득층 지원을 내세운 신용회복지원 프로그램이 지난해 말부터 쏟아져 나왔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자 또는 원금의 50%까지 삭감해준다. 법원의 파산제도는 ‘성실하나 불운한 채무자’의 빚을 최대 100% 탕감해준다. 문제는 제도를 악용하는 채무자다. 한 공무원 가족 3명은 은행에서 1억 원씩 총 3억 원을 빌린 뒤 사채를 쓰고 있다는 가짜 서류를 만들어 재산이 없는 것처럼 해놓고 개인회생을 신청해 부채 탕감을 요구했다. 인터넷에서는 ‘카드 연체는 2년을 버틴 후 제삼자를 내세워 협상하라’는 등 이자를 탕감받거나 채권추심을 피하는 방법이 유료로 판매되고 있다.
▷채무자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사전(事前) 채무조정(워크아웃) 제도가 13일부터 1년간 시행된다. 기존의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이용할 수 없는 3개월 미만의 단기연체자가 대상이다. 심사를 통과하면 연체이자는 전액, 대출이자는 30%가량 감면받는다. 금융위원회 측은 “금융당국이 이자감면 제도를 마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경기침체를 맞아 이렇게 신용불량자를 줄인다면 빚을 진 가계와 금융기관 모두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편(1439년)에는 지금의 감사원인 사헌부가 ‘어리석은 백성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부채를 탕감해주지 말라’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물론 그 이후 여러 왕이 가뭄 등으로 궁색해진 백성의 부채를 탕감한 기록이 가끔 나온다. 과거나 지금이나 불가피한 지원일지라도 적정 수준에 그쳐야 한다. 선의의 지원제도가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다면 신용사회가 흔들리게 된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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