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3년 미국 선교단체의 초청으로 미주를 돌며 연주와 강연을 다녔다. 당시 미국에서 나를 바라보는 미국인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나를 그냥 똑같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내가 “안녕” 하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녕”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부분 잘 아는 사람에게만 인사를 한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인사를 건네면 “저 사람 뭐야? 왜 저래?”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알려진 장애인이든 아니든 모두 동등하게 비장애인이 인사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예전보다는 한국의 장애인 복지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나 아직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할 수 없는’ 존재로 봐서는 안 된다. 시각장애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와 두 팔이 없는 가수 레나 마리아처럼 장애인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봐 줘야 한다. 장애인도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가 정말로 안타깝다,
한국의 장애인 시설은 좋아지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바로 인식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비장애인 사이에서도 생긴 모양을 갖고 인사를 한다. 어머니는 경남 고성 출신이신데 경남에 공연이 있을 때면 어머니 친구분이 리허설 시간에 찾아오신다. 이분들은 “갑선아(어머니 성함)! 이게 을매∼마이고. 근디 니 와 이케 말랐노?”라고 외모를 소재로 인사한다. 그냥 좋은 오후 혹은 좋은 저녁 하면 될 텐데 굳이 이렇게 인사를 해야 할까.
장애인의 날(20일)을 맞으며 나는 장애를 주신 신에게 다시 감사했다.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 즉 아주 작은 키 그리고 네 손가락으로 태어나고 싶다. 나는 지금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나는 손가락이 네 개 있음을 슬퍼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네 개를 주신 신께 늘 감사했다. 나는 두 발이 없는 점을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는 열정과 의지력을 주심에 감사한다.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살 때 다 같이 행복해진다. 미래를 걱정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지금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내게 남겨진 부분을 최대한으로 극대화하는 일에 시간을 소중히 사용했다. 지금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장애인의 모습은 경이롭도록 아름답다. 장애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기뻐해 주고 평범한 시선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면 우리 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별할 이유가 없다.
장애인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린다면 장애인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에 무엇인가 울어야 될 자신의 이유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동할 때 그리고 행복할 때 울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장애인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 진실한 눈물이 아니라면 차라리 밝게 웃어주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참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을 격의 없이 대하는 평화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비장애인의 마음에 참된 평화가 머물기를 기도한다.
이희아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