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직전 대통령의 ‘고문 메모’를 공개하면서도 관련자들을 불기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군이 저지른 고문 행위를 조사하라는 일각의 요구를 오바마 대통령이 받아들였다면 부시 전 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은 법정에 서야 한다.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미국법과 국제법이 금지하는 선을 분명히 넘었지만, 그들이 싸우던 알카에다엔 금지선(레드라인)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승객이 가득 찬 비행기를 미사일로 이용하고, 걸어 다니는 인간폭탄으로 회교사원을 폭파했다. 제2의 9·11이 벌어진다면 미국인들은 “고문보다 더한 것이라도 하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런데 부시가 대통령 재임 중 저지른 불법행위가 국가안보 직무와 관련이 없고, 개인적 비리였으면 미국 여론이 어떻게 돌아갔을까. 부시가(家)와 가까운 기업인이 대통령의 자녀가 차린 페이퍼 컴퍼니에 500만 달러를 호의적으로 투자했거나, 아내 로라 부시에게 100만 달러를 주었다고 해보자. 부시 전 대통령 부부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1억 원짜리 피아제 시계를 선물받고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보자. 미국 여론은 지금과 180도 달라져 불기소 결정을 했다가는 오바마 대통령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불기소 주장은 超法的발상
어느 나라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조사와 기소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과 국민 여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미국은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포괄적 사면권을 대통령이 행사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에겐 그런 권한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00만 달러는 아내(권양숙 씨)가 나 모르게 받은 것이고, 500만 달러는 아들과 조카사위가 투자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권 씨가 총무비서관을 통해 100만 달러를 넘겨받으면서 남편에게 한마디도 안 했다는 진술을 순진하게 믿으라는 것인가. 30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없이 박연차 회장을 불쑥 찾아갔는데 선뜻 500만 달러를 투자하더라는 말인가.
우리나라 사법관행은 조선시대 이래로 역적질을 하지 않는 한 여간해서 부부를 함께 처벌하거나 부자를 함께 감옥에 보내지 않는다. 검찰은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노 전 대통령이 법적 책임을 아내와 아들에게 분산시키는 전략을 편다고 보고 있다. 피의자이자 ‘꾀바른 변호사’인 그의 방어전술은 할리우드의 법정 추리물을 보는 듯하다. 그는 피의자 방어권이 벽에 부닥치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라는 카드를 들고 나온다. 그는 이 카드로 박 회장과의 대질신문을 거부했고, 권 씨 재조사에도 불응하고 있다.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대형버스를 탄 노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에 선거 유세하러 가는 것도 아닐 텐데, ‘파이팅!’을 외치는 국회의원은 누구이고, 노란 풍선을 흔드는 지지자들은 또 뭔가. 노 전 대통령이 부끄러움을 안다면 측근들을 통해서라도 말렸어야 옳다.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임박하면서 “폐족(廢族)을 만들었으니 이 정도로 그만두고 재판도 하지 말자”는 주장이 나온다. 지금 그가 받고 있는 혐의는 국정을 의욕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불법행위도 아니고, 그야말로 개인적인 파렴치 범죄다. 그를 법정에 세운다고 해서 국가 이미지가 흐려진다거나 국론이 분열된다는 논리에 수긍할 수 없다. 권력자가 거액의 뇌물을 먹어도 처벌받지 않는 나라야말로 과거 남아메리카에 흔하던 ‘바나나 공화국’이다. 노 전 대통령을 기소하지 않으면 우파는 물론이고 양심적인 진보세력으로부터도 비판이 높아져 국론분열이 더 심해질 것이다.
권력 비리 봐주면 ‘바나나 공화국’
600만 달러를 “생계형 범죄”라고 봐주면, 정말 쌀이나 라면을 훔치고 무전취식(無錢取食)으로 붙잡힌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노 전 대통령 재판이 경제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시각에 대해서는 경제계 인사들이 가장 먼저 실소할 것이다.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다면 불구속 재판의 대원칙이 전직 대통령에게만 적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그가 성실하게 조사를 받았는지,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정말로 없는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노 전 대통령을 아예 법정에 세우지 말자는 것은 그의 배신과 비열함에 분노하는 수많은 국민을 무시하고,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초법적(超法的) 발상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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