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에서 손님이 여종업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돈이나 금품을 주기로 약속했다면 법률상 효력이 있을까. 이 경우도 민법 103조의 ‘선량한 풍속을 위반한 행위’에 해당돼 반드시 갚아야 하는 채무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반대로 여종업원이 손님에게서 금품을 받은 뒤 손님의 마음이 변해 돌려달라고 하더라도 민법상 ‘불법원인 급여’(746조)에 해당돼 되돌려줄 의무는 없다. 이처럼 채무가 있어도 꼭 갚을 필요가 없는 경우를 ‘자연채무’라고 한다. 사실상 채무로 보기 어렵다는 뜻에서 ‘불완전 채무’라고도 불린다.
▷자연채무는 로마법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로마시대엔 엄격한 방식으로 맺은 계약만 법률상의 채권채무 관계로 인정했기 때문에 자연채무의 영역이 꽤 넓었다. 지금도 프랑스 중국에는 자연채무와 관련한 명문(明文) 규정이 있지만 우리나라와 독일 일본 민법에는 그런 규정이 없다. 학설과 판례로 인정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100만 달러를 받은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으면서 이 개념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부인 권양숙 씨가 100만 달러를 받아 ‘갚지 않아도 되는 자연채무’를 갚는 데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갚을 필요가 없는 빚을 갚으려고 굳이 박연차 씨에게 100만 달러를 달라고 한 이유는 뭔가”라는 검찰 추궁엔 “집(부인)에 물어봐야겠다”고 얼버무렸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빌린 돈이어서 갚지 않아도 되는데 그쪽 사정을 봐서 갚았다’는 주장인 듯하다. 그가 전직 대통령의 체통도 집어던지고 법률지식을 동원해 궁지에서 빠져나가려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 같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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