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명동 예술극장 재개관

  • 입력 2009년 5월 13일 02시 54분


6·25전쟁으로 폐허로 변한 서울 명동에 1951년 몇몇 다방이 문을 열자 문인과 예술인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들은 다방에서, 술집에서 인생과 예술을 논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시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에 나오는 대목 그대로 하루를 보냈다. 시낭송회를 갖고 음악의 밤을 열었으며 미술전시회를 개최했다. 명동은 1950, 60년대 문화예술의 산실이자 순수와 낭만이 가득했던 사랑방이었다.

▷1957년 국립극장이 명동에 자리 잡으면서 ‘명동 시대’는 날개를 달게 된다. TV가 없던 시절이라 연극은 최고의 인기였다. 국립극장은 초기에 연극만 공연하다 무용 합창 등으로 장르를 확대했다. 명동은 예술가와 문인들로 더 북적였다. 탤런트 최불암 씨의 모친이 운영했던 ‘은성’이라는 술집은 가난한 문화예술인의 집결지였다. 문인 예술가들에게 언제든 외상을 주는 넉넉한 곳이었다.

▷정부는 광복 직후 북한의 공연예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다는 소식에 자극받아 국립극장 창설을 서둘렀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연극인들이 광복 직후 대거 월북하면서 북한은 한 발 앞서 있었다. 하지만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창립 첫 작품으로 연극 ‘원술랑’을 공연하자마자 6·25전쟁이 일어나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울시가 소유했던 시공관을 같이 사용하는 형식으로 명동에 입성한 것이다. 1973년 서울 장충동에 새 국립극장을 지어 이전하면서 명동 국립극장은 사라졌고 명동의 역할도 서서히 끝났다. 문인 예술인들은 명동을 떠났다.

▷옛 국립극장이 ‘명동 예술극장’이란 이름으로 34년 만에 다시 문을 연다. 1975년 민간회사에 팔렸던 건물이 원형을 잃지 않고 보존되어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부가 문화예술계 의견을 수용해 다시 사들여 극장으로 복원했다. 6월 5일 재개관을 앞두고 이곳을 찾은 원로 연극인들이 눈물까지 흘렸다는 소식이다. 명동이 다시 문화의 중심지가 됐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일 것이다. 가난했지만 낭만이 있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도 작용했을 법하다. 이곳이 명동 예술의 부활을 이끌기를 기대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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