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돕자고 전쟁을 한다는 겁니까?”
“이들은 공산주의를 원치 않아요.”
파울러는 말한다. “이들에겐 밥이 필요해요. 살육도, 백인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참견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지금의 베트남은 파울러의 말처럼 평화와 안정, 독립을 이뤘다. 9·11테러 이후 등장한 선악이원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구호요원 파일의 열정과 맥이 통한다. 이들은 중동과 서아시아 국가들에 자유, 민주주의, 법치를 가져다준다면서 나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애초 가졌던 ‘고귀한 의도’는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의 정직한 짐꾼들을 곤경에 몰아넣고 황폐화시켰다. 주인공 파울러의 현실주의가 ‘전쟁’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돼버린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 시대 코드로 부활했다.
베트남의 성공은 현실주의와 전쟁에 뿌리박고 있다. 미군 5만8000명, 베트남인 300만 명 이상이 숨진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5년 만에 양국이 공동번영을 위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만든 것도 현실주의다. 글로벌 경제위기에도 베트남은 올해 4% 이상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베트남 장성들이 남중국해에서 미 핵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를 참관했다. 미국에선 베트남 관료들이 교육받고 있다. 2001년 양자 무역협정 체결 이후 미국은 베트남의 가장 큰 수출시장이 됐다. 인텔 컴퓨터와 빅토리아 시크릿 속옷이 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불티나게 팔린다.
베트남 사례는 여러 교훈을 남긴다. 첫 번째는 미국이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가 다른 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베트남이나 중국처럼 오늘날엔 쿠바나 이란이 그렇다. 이들 나라는 전쟁이라는 아픈 기억도 없다.
1972년 2월 미국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상하이공동성명은 체제와 외교정책의 근본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하고,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과 상호호혜, 평화공존 원칙에 기초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에도 이 정신이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정권은 이 정신을 잃어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상호존중’ 원칙으로 돌아가 쿠바와의 냉전 잔재와 이란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려 한다.
베트남인들이 보여준 ‘용서’는 신비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승자의 관대함만으론 설명이 안 된다. 베트남 인구의 70%가 종전 이후 태어났다는 것도 충분한 이유는 아니다. 미래를 향한 베트남인들의 힘은 ‘문화’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불교와 유교는 현재와 미래가 소중하다고 설파한다. 베트남에선 조상들을 숭배한다. 그렇다면 외국 군대에게 죽은 조상은 어떻게 볼까.
케네디 페어픽스 주베트남 미국영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후손들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후손들의 번영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고 기억되길 바랄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중동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더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꿈을 위해 “이들은 공산주의를 원치 않아요”라고 말했던 파일을 버리고 “그들에겐 밥이 필요해요”라고 말했던 파울러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찌민에서
로저 코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