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은 살아서 그랬던 것처럼 죽어서도 조문객을 확연하게 갈라놓았다. 봉하마을 분향소에는 핵심 측근과 열성 지지자들이 모여 밤을 새웠다. 고인의 노선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덕수궁 분향소는 제2의 촛불을 기획하는 사람들의 전초기지 비슷했다. 서울역사박물관 분향소에는 공식적 직함을 가진 조문객들이 주로 찾았다.
1980년대 이후 5, 6월에는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놓는 격변이 일어난다. 1980년 5·18,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작년 5월에는 촛불시위가 터져 석 달을 끌고 갔다. 이제 해마다 5월이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식이 열릴 것이다. 추모 열기를 6월 10일까지 이어가려는 움직임도 있다.
피의자를 ‘순교자’로 바꾼 국민장
검찰수사의 압박감과 수치심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그의 자살은 ‘640만 달러’ 이후 이탈해가던 지지자들을 다시 묶어내는 효과를 냈다. 그는 본능적 판단에 따른 역(逆)발상과 승부수의 대가였다. 경남 출신이면서 호남당에 들어가 대통령의 꿈을 이루었다. 선거법을 위반하는 발언으로 탄핵을 자초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압승을 이끌어냈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노무현스러운 죽음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법정의 피의자로 쇠잔(衰殘)해가는 일은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사즉생(死卽生)으로 절벽 아래로 한 몸 던지면 자신이 일으켜 세워 보존해 가고자 했던 가치와 이념을 살려낼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애도 분위기에 편승해 ‘정치검찰, MB, 메이저 신문이 고인을 정치적으로 타살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노 전 대통령이 알았든 몰랐든 640만 달러를 받은 사람은 결국 아내와 아들이라는 점에서 법적 도의적 책임이 따른다. 무의미한 가정법이고 결과론이지만 검찰이 구속이든 불구속이든 그를 빨리 재판에 회부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검찰이 사법적 결정을 미루고 질질 끌다가 법정에서 진실이 규명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노 전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에게 애초부터 도급(都給) 수사를 맡길 일이 아니었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검찰도 우리 사회의 숙제가 돼 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류 신문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그는 5년 동안 정부기구와 홍위병 단체들을 동원해 비판 언론을 고사시키려고 했다. 신문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거나 이미지를 훼손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민주주의 선진국들은 사양길에 든 제4부를 살려내기 위해 정책적 지원을 쏟아 붓는 터에, 그는 자유언론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던지, 사감(私感)이 깊었던지, 신문을 짓밟고 기자실을 대못질해 취재를 방해했다. 고인이 종내 신문과 화해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것은 불행한 일이다.
레이거니즘 대처리즘처럼 ‘노무현’의 영어 표기에 ‘이즘’을 붙이면 로무혀니즘(Rohmoohyunism)이 된다. 노 전 대통령은 풍운아처럼 살다 충격적으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가 추구하던 이념은 살아남을 것인가. 로무혀니즘이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아이콘(icon)이 되기에는 강점과 함께 약점도 많고 한계도 있다는 생각이다.
理想추구의 아이콘으론 한계
최초로 낙향(落鄕)한 대통령이 되어 밀짚모자를 쓰고 막걸리를 마시고, 동네 꼬마들과 구멍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사진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대통령 재임 시에도 강남 부자와 기득권 세력을 때리면서 ‘서민 대통령’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가 추구하던 가치는 권위주의 탈피, 기득권에 대한 도전, 평등주의, 지역 균형발전, 지역주의 극복 같은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집권 기간 수많은 안티(anti)를 만들어냈다. 정제되지 않은 언행, 대한민국 현대사를 불의가 득세한 역사로 보는 인식, 실용과는 거리가 먼 좌향좌, 노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행위…. 그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하려는 사람들도 그를 갈등과 분열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서는 어떤 일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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