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톈안먼(天安門) 광장 시위대 학생들의 대변인이었고 대만으로 망명한 우얼카이시(吾爾開希)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베이징 시위대는 무엇을 원했나”라는 의문이 남아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원한 사람은 소수였다. 대다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꿈꿨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불어 온 시대정신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오쯔양(趙紫陽)에게서 중국의 고르바초프를 찾을 수 있다고, 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제3의 길로 합쳐지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라고 믿었다.
류샤오보(劉曉波)처럼 중국에 살아있거나 우얼카이시처럼 망명한 톈안먼 사태의 주인공들은 오늘날 그 생각이 잘못임을 인정하고 있다. “중국도 공산주의 독재와 자유민주주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류샤오보는 수감되기 전 그의 웹사이트에 썼다(그는 올해 1월 다시 체포, 수감됐다). 그러나 제3의 길,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산당은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 평화롭게 이행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이행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국은 톈안먼 학살 이후 완전히 변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중국인의 20%는 20년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안락한 도시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나머지는 여전히 빈곤에 처해 있지만 언젠가는 이 빈곤이 완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중국인은 여전히 공산당과 대화하지 못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자오쯔양을 실각시킨 후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새로운 자오쯔양’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경계했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 내에 강경파와 개혁파의 갈등은 없다. 강경파만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톈안먼 학살에서 덩샤오핑에 협력한 측근이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공산당의 붕괴로부터 절대 개혁정책은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독재체제에 개혁이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진시황이 2000년 전 분서갱유(焚書坑儒)하고 단 하나의 역사만을 쓰도록 명령한 것처럼 공산주의 왕조는 티베트가 중국과 ‘재통일’해 ‘행복’해하고 1989년 톈안먼 광장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쓰게 했다. 학살(massacre)? 공식적으로 그런 건 없었다. 언론과 교과서는 즉각 질서회복이 된 유감스러운 ‘사건(´ev´enements)’이라고만 언급한다.
그러나 망각을 막기 위해 딩쯔린(丁子霖)이 남아 있다. 전 중국런민대 교수인 그는 고령인 덕분에, 또 미국 인권단체의 지원도 있고 해서 보호받고 있다. 딩쯔린과 톈안먼 어머니회는 희생자의 명단 작성을 원한다. 당시 적십자는 희생자를 약 3000명으로 추정했지만 톈안먼 어머니회는 400명가량의 명단만 갖고 있다. 오늘날도 희생자 가족은 위협 속에 살고 자식의 희생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인민군이 시신을 불태웠기 때문에 시신이 없어 자식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딩쯔린은 17세 아들의 유골이나마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종자 가족은 시신이나 유골이 필요한 전통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다.
역사를 뺏기면 기억도 상실하는가? 중국 공산당이 바라는 바다. 그러나 그 희망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어디서나 톈안먼을 말하는 것은 금지돼 있지만 누구나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6월 3, 4일에도 지난 20년간의 그날과 똑같이 모든 사람이 톈안먼을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사는 침묵에 의해 기념될 것이다.
기 소르망 프랑스 문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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