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法과 수치심을 잊은 사람들

  • 입력 2009년 6월 20일 02시 59분


그리스 신화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 세상에 불과 기술을 보내줬지만 그것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어 제우스의 아들 헤르메스가 법과 수치심을 추가로 선물했다고 전한다. 수치심은 자발적인 준법의 원동력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모르면 법질서가 유지되기 힘들다는 뜻이다.

서울 세종로 사거리의 교통신호등이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과 차량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거리는 엉망이 될 것이다. 각자가 조금씩만 참고 기다리면 사거리는 질서 있게 소통될 수 있다. 법과 수치심의 효용성은 이런 데 있다. 신호체계에 문제가 있다면 일정한 절차를 통해 고쳐야 하고, 그때까지는 누구나 신호를 지켜야 교통질서가 유지된다.

야당이 마당 열어주는 불법집회

요즘 우리 사회의 큰 뉴스는 대부분 법의 문제로 귀착된다.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그 흔한 시국선언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앵무새처럼 외치지만 사실은 ‘법치주의의 위기’라고 해야 옳다. 서울시청 앞의 서울광장에 나가보면 법치주의의 위기를 자주 절감하게 된다.

서울광장은 시민들의 도심 휴식처로 인기다. 잔디나 분수대 위를 마음껏 뛰노는 어린이들과 소풍 나온 가족들, 점심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의 유쾌한 대화와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는 곳이다. 그런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롭고 행복해진다. ‘평화의 광장’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서울광장’ 하면 역설적으로 불법 폭력시위가 먼저 떠오른다. 이러다가 ‘서울광장 폭력시위’가 외국인 관광상품으로 둔갑하지 않을까 두렵다. 시위진압 경찰에 둘러싸인 채 열리고 있는 집회를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관심 깊게 구경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6·10 범국민대회’ 전날 밤 민주당 의원 30여 명은 서울광장에 들어가 밤샘 농성을 벌였다. 행사 당일엔 무대 장치 물품을 실은 트럭을 진입시키기 위해 경찰과의 격렬한 몸싸움도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서울광장은 불법을 저지른 측이 ‘사수(死守)’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영웅’이 되어 집회에 모인 2만여 명(경찰 추산)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집회 참가자들은 주변도로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6월 국회를 거부하고 나온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은 무대 앞 중앙에 모셔졌고, 수치심을 보이기는커녕 의기양양했다.

그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발표한 전교조의 시국선언도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공무(公務) 이외의 집단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 위반이다. 교육자들이 학생들에게 국가 법질서를 어지럽히도록 가르치는 셈이다. 서울대 등 국공립대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그렇다. 그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헌법상의 자유와 권리보다 특별법인 국가공무원법상의 책임이 우선 적용되는 사람들이다.

일상화된 불법, 심각한 사회병리

MBC도 광우병 왜곡보도를 언론자유의 문제로 호도하고 있지만 당찮은 일이다. 광우병의 위험을 과장 또는 오역(誤譯)한 허위 사실을, 그것도 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낳은 악의적 보도를 ‘공익’이라고 주장하는 것부터 철면피하다. 그것은 보도가 아니라 선동이었다. 언론의 자유에는 사회적 책임이 동반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왜곡보도로 농정(農政) 관계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형사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불법이 일상화돼 있다. 그것도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과 미래세대를 가르치는 교원들, 사실보도와 비판에 충실해야 할 일부 언론 종사자들이 앞장서고 있다. 전직 대통령마저 국민이 선택한 정권을 향해 들고 일어나자고 선동한다.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불법이 아니라고 억지를 쓴다. 부끄러움도 없다.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라 법치주의가 벼랑 끝에 섰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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