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딸애의 기세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만으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능력이 있다 해서 과거를 용인하는 건 문제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저런 사람은 영원히 퇴출돼야 마땅하다”며 열을 올리는 거였다. 평소에도 정의감이 남다른 아이이고, 때문에 불필요한 일에 휩쓸리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터라 나는 부러 좀 심드렁하게 말했다. “출세한 이후에 사귀던 여자와 헤어지는 일은 흔하고 흔하다. 사람은 변한다. 변한 남자에게 매달리는 여자가 미련한 거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야.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여자가 겪었을 고통을 어떻게 미련하다, 한마디로 내칠 수 있어?”
나는 졸지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 됐고 그때부터 아이와 나는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사랑이 깨어졌을 때의 태도, 임신과 그 책임에 대한 문제, 공인으로서의 자세, 피임을 여성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 사회의 남성 중심적 사고 등등 이야기는 마구잡이로 번져나가고 우리의 음성은 조금씩 높아졌다.
감정과 도덕에 대한 딸과의 언쟁
“너는 여성학 한 강좌 들었지만 엄마는 여성학으로 논문 쓴 사람이다”라고 가방 끈 길이로 누르려 하자 “지식이 문제예요? 마음이 중요하지”라는 핀잔이 따랐다. “여자를 버렸다고 퇴출돼야 한다면 피카소나 로댕은 인간도 아니겠네”라는 말에는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냐. 방향을 바꾸지 마라”는 강력한 항의가 이어졌다. 주제는 감정과 도덕의 문제로 좁혀졌지만 끝내 딸애와 나는 화해로운 결말에 이르지 못했다. 마침내 딸애는 내게 말했다. “내 인생관이나 사고방식에 엄마의 영향이 지대한데, 정말이지 내 관점을 다시 생각해야 할까 봐.”
내 말도 이어졌다. “본래 그런 거다. 관점이라는 거, 인생관이라는 거, 늘 회의하고 돌아보고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그러면서 나이 드는 거다. 엄마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다, 세상은 냉정하고 사는 일이란 치사하고도 엄숙하다.” 하지만 아이는 실망 가득한 낯으로 방을 나가는 거였다.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내게도 저처럼 정의감에 불타고 흥분하고 울분에 젖던 기억이 있었던가. 내 스무 살 시절을 떠올렸다.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의 기억, 우리의 모든 과거가 완벽하게 보존되는 영역이 있다고 한 이는 플라톤이었던가. 내 기억은, 그러나 그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의심하게 했다. 기억은 간사했다. 기억 속의 나는 언제나 고민하고 아파하며 세상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날을 새우는 여자애였으며 다른 이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듯했으나 나는 내 기억을 신뢰하기 힘들었다.
매달린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는 아이의 말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그랬다. 나는 매달린 기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랑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많은 이가 그러했듯 시대를 아파하고 고민하고 힘겨워하였으나 무언가에 매달리기를 못내 두려워하고 겁냈다. 그 결과 나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비록 내상(內傷)이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러나 그것을 비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세상이 뭔지 차츰 깨달아가겠지
스무 살에서 쉰이 되기까지의 내 기억을 헤집는 동안 날이 하얗게 밝아왔다. 딸아이의 방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엄마의 가치관을 의심한다는 딸아이의 말이 가슴 아팠으나 또한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딸아이가 다행스러웠다. 의심하는 것을 의심한다 하고, 싫은 일을 싫다 하고, 거슬리는 점을 거리낌 없이 발표하고…. 이즈음의 세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이의 행동이 걱정스러운 바가 없지 않았으나 이 역시 미쁘고 고마운 일로 여기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일부러 일러주지 않아도 아이는 차츰 깨달아갈 것이다. 부딪히며 상처를 입으며 알아갈 것이다. 세상이 얼마만큼 냉정한지,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부박하고도 치졸한지, 그런 한편 꿈과 현실이 뒤섞이듯 기억과 실제가 엮여 짜내는 나날이 실로 심오한 진실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하나, 드러난 것과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서하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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