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권순택]여론조사 정치의 꼼수

  • 입력 2009년 6월 30일 02시 56분


빌 클린턴은 여론조사에 가장 크게 의존한 미국 대통령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클린턴은 매주 여론조사를 주문했고 심각한 정치적 논란이 있을 때에는 매일 저녁 여론조사를 실시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그는 정치적 원칙보다 대중이 어떤 결정에 찬성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론조사에 매달렸다. 이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은 자신의 신념을 전파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여론조사를 사용했지만 클린턴은 어떤 신념을 가져야 할지를 알기 위해 여론조사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여론조사 결과가 한국처럼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도 드물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여론조사라는 ‘도박’으로 결정했다. 정당의 공직 후보 선출에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하는 나라도 한국과 대만 외에는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 여론조사는 영향력에 비해 조사 결과의 신뢰도가 매우 낮다. 특히 전화 여론조사는 전화번호부 등재율이 절반에 불과하고, 휴대전화만 이용하는 사람들이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며, 응답률마저 매우 낮아 결과를 믿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이 많다.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 민주당 측 위원들이 20일 실시한 ‘자체 여론조사’ 결과의 신뢰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는 조사의 응답률은 고작 13.1%였다. 응답자의 43.4%는 미디어법안을 잘 모른다거나 들어본 적도 없다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대기업에 의한 여론 장악’ ‘신문기업에 의한 여론 독과점’ ‘민주주의 기반 약화’ 같은 부정적 표현이 포함된 질문을 앞부분에 배치한 질문 순서도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 여론조사는 애당초 편향된 의도에 따라 실시됐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조사 방법의 문제와 별개로 미디어법안처럼 복잡하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정책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면 그 많은 국회의원과 전문가는 왜 필요한가. 국회 무용론(無用論)이 나와도 민주당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여론조사로 정책을 결정했다면 경부고속도로도 건설하지 못했을 것이고 청계천도 복원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총선을 치러 국회를 구성해 놓고 반대하는 입법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여론조사로 뒤집으려 하는 ‘민주주의’는 선진국엔 없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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