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 인기 드라마인 SBS ‘찬란한 유산’의 성공 비결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극본의 힘’이다. 이 드라마는 매번 새로운 반전과 갈등 요소로 시청자들이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게 한다. 특히 불륜 등을 걸러낸 ‘착한 드라마’로 불리며 방송가에서 인기 드라마의 모범으로 꼽히고 있다. 이 드라마는 4월 25일 시청률 16.9%로 출발해 이달 19일 43.4%를 기록하며 올해 전체 방송 프로그램 중 일일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찬란한 유산’은 26일 28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착한 아이가 부자 할머니 만나는 얘기 극화
은성 남매의 “같이 날자” 가장 기억에 남아
‘찬란한 유산’의 극본을 쓴 사람은 1999년 데뷔한 40대의 드라마작가 소현경 씨. 11년째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두드러진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2007∼2008년 준비해 둔 미니시리즈가 제작사 사정으로 무산되는 아픔도 겪었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부탁했지만 그는 “작품을 쓸 때는 여기에만 집중하고 싶다. 끝나고 이야기하자”며 번번이 거절했다. 종영을 나흘 앞둔 22일 소 씨에게서 “드디어 다 썼다”며 연락이 왔다. 그리고 23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2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작업실은 책상 세 개와 프린터, 김형경 씨의 소설 ‘사람 풍경’ 등 네 권의 책, 커피포트, 싱크대가 전부였다. 그는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올해 2월부터 하루 18시간 이상 작품을 썼다고 했다. 한 달 이상 작업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잘되기를 희망했고, 망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 입장에서 시청률이 안 나오면 너무 괴롭다.”
―방송가에서 막장 드라마 속 ‘착한 드라마’의 인기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가에게 막장 드라마라는 지적은 너무 잔인하다. 내 드라마에도 자극적인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면 극중 백성희(김미숙 씨)의 행동처럼…. 다만 나는 악인(惡人)의 행동에 나름의 개연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착한 드라마를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시청률에 집착하는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 시청률이 낮으면 비난의 화살이 작가에게 쏠리기 십상이다. 극단적 설정을 한 막장 드라마가 쏟아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는 “대본을 믿어 준 제작진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집필하는 드라마마다 빈틈없고 흡인력 있는 대본으로 고정 팬을 몰고 다닌다. 소 씨 스스로도 “대본에 쉬어가는 부분을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또 시간에 쫓겨 대본을 부분 부분 넘겨주는 ‘쪽대본’을 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드라마 작가는 스트레스를 무척 많이 받는 직업으로 알려져 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 어려서부터 소설가가 꿈이었다. 우연히 방송작가 수업을 들으며 재미를 느꼈고 1999년 방송국 극본 공모에 당선돼 방송작가가 됐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소설도 써보고 싶다.”
―이 드라마에는 유산을 둘러싼 갈등, 착한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두 남자, 잃어버린 동생을 향한 누나의 애틋함 등 다양한 극적 요소가 등장한다. 줄거리 착상은 어떻게 했는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노트에 짧게 적어놓는 습관이 있다. 예전에 ‘착한 아이가 착하기 때문에 부자 할머니를 만나서 잘되는’ 이야기를 노트에 적어놓은 적이 있다.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해보지 않는가, 나도 모르는 먼 친척을 만나 유산을 받는다는 상상…. 또 극중 장숙자 할머니(반효정 씨)처럼 본인이 인생을 살면서 경험을 많이 한, 아주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 여기다 요즘 시절이 어려워 ‘돈’에 관한 이야기도 넣고 싶었다.”
그는 드라마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함구했다. “해피엔딩인지만 알려 달라”고 부탁하자 “마지막 방송을 앞둔 작가에게 결론을 이야기해 달라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며 웃었다.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원래의 구상과 달라진 점이 있나.
“드라마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생각해 놓는 스타일이다. 결말도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썼다. 준세(배수빈 씨)가 진성식품 주주총회에서 캐스팅보트를 쥐는 장면도 미리 생각해 놨었다. 다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캐릭터가 살아서 움직이는 점은 있다.”
―가수 출신으로 드라마 주연 경험이 없는 이승기 씨를 주인공 선우환 역에 캐스팅한 건 모험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승기 씨를 본 것은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서 조연으로 나오는 것뿐이었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그가 가슴 아픈 멜로 연기를 하기엔 ‘너무 어린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굉장히 노력했다. 또 극중 선우환이 점점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캐릭터라 누가 맡든지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미숙 씨는 연기 인생 처음으로 악역을 맡았다.
“진혁 PD와 나는 처음부터 그를 백성희 역할로 생각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그의 눈이 너무 선해 악역에 안 맞을 거라고 하더라. 내가 그리고 싶은 백성희 역은 아주 완전한, 눈이 번들거리는 악역은 아니었다. 고상하면서 지적인 이미지의 악역에 그가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한효주 씨는 이번에 데뷔 이래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
“그가 맡은 고은성 역할은 역경을 많이 헤쳐 나가야 하는데, 인상이 너무 선해 걱정이었다. 그런데 캐스팅 소식을 듣고 예전 출연작을 보니 연기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대본 연습 때 왔는데 내가 상상한 은성이의 모습을 그대로 연기해 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드라마 초반에 은성이가 자폐아 동생과 함께 자살하러 가는 장면이 있다. 서울 외곽의 성벽에서 뛰어내리려는 장면을 찍었는데, 은성이가 동생이 자폐아인 만큼 은유적으로 ‘바람 참 좋지. 우리 같이 날자’라고 말한다. ‘죽자’는 표현을 ‘날자’라고 한 것이다. 쓰면서 나도 울컥했다.”
소 씨는 인터뷰에는 응했지만 자신에 대한 개인정보를 기사화하는 것은 삼가달라고 부탁했다. 드라마 작가인 만큼 대중에게 ‘드라마’로만 다가가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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