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F는 남북한을 포함해 23개국이 참여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유일한 정부 간 다자 안전보장 협의체다. 제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2002년 이후 남북한과 북-미 외교장관이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하면서 ARF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2002년 백남순 북한 외상을 만나 북-미 대화 재개 방안을 논의했다. 파월은 ‘풀 어사이드 미팅(pull aside meeting·회담장에서 상대방을 다른 사람이 대화를 들을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해 만나는 형식)’을 이용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도 2008년 북 외상을 만났다.
▷올해는 미국이 북한을 대면할 생각이 없었다. 미 국무부 관계자들은 워싱턴에서부터 “ARF에서 북한 관리들과 개별적으로 만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북한도 외상이 참석하던 관례를 깨고 대사급을 대표로 보내 장관급 대화 가능성을 없애 버렸다. 미도 북도 양측 관계가 다자외교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짧은 접촉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꼬인 것을 인식하고 대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결국 북-미는 각자 갈 길을 가고 말았다. 힐러리는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전제로 북핵 해결을 위한 포괄적 패키지를 제안했으나 북은 “말도 안 된다”며 거부했다. 힐러리와 북 사이에 설전(舌戰)까지 벌어지고 있다. 힐러리가 북을 ‘철부지 10대’로 묘사하자 북은 ‘소학교 여학생’ ‘부양받아야 할 할머니’ 등 인신공격성 비난을 퍼부었다. 북-미 사이에 오고가는 말의 공방이 초등학교 학생들 말싸움 같다. 언제나 그랬지만 북의 험구(險口)에서 외교적인 수사(修辭)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힐러리는 북이 변하기 전에는 어떤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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