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크기임에도 서로 자기가 크다고 나서는 풍경을 꼬집는 말입니다. 만약 서로 크다고 키를 재는 도토리들을 내려다보는 아름드리나무가 있다면 그것의 눈높이에서 도토리들의 행태는 어처구니없는 난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인간 세상에서도 도토리 키 재기와 비슷한 일이 숱하게 일어납니다. 남과 비교하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가상 눈높이는 사람들의 욕망과 허영을 끝없이 자극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날마다 시끄럽고 쟁투는 끊이질 않습니다.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고자 하는 한 사람의 눈높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견성을 얻은 사람들은 눈높이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높이 대신 정신적인 위성시각을 얻고 살아갑니다. 위성시각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나입니다. 위성시각에는 높낮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지상의 척도인 눈높이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 수십 층 빌딩도 대교도 차량행렬도 모두 미물처럼 작아 보입니다. 어린 시절 산길을 가다 만난 개미떼 행렬처럼 인간의 행렬도 위성시각으로 내려다보면 한없이 작아 보입니다. 그때 개미떼의 눈높이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인간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개미떼를 내려다보던 위성시각으로 이제는 우리 스스로를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위성시각은 눈높이에 얽매어 앙앙불락하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공중의 또 다른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로 위성시각이 만들어집니다. 지구인이 쏘아올린 위성이 지구 궤도를 돌며 지구의 모습을 찍어내는 것처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또 다른 나의 시선으로 주시하면 도토리 키 재는 한심한 짓거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성시각에서는 모든 사람이 종으로 횡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몇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이 되는 친연성도 발견하고 깊은 유대감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위성시각은 의식의 눈입니다. 그것을 만들어 자신을 주시하면 내가 아니라 나와 연계된 전체가 보입니다.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면 작은 나를 벗어나 넓은 세상, 높은 세상, 깊은 세상의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그대의 위성시각은 어디에 떠 있나요?
작가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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