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 조연들의 요청이 없었다면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비롯한 조문단은 안 왔을까. 대화 모드로 전환할 절호의 기회를 북이 그냥 흘려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명분과 형식을 빌려서라도 남측의 서거 정국을 이용하러 왔을 것이다.
북 조문단을 맞은 것은 우리 정부로서도 나쁠 건 없다. 그들은 남측의 정부가 아닌 구우(舊友)들과 의기투합했지만, 와서 보고는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하지 않았을까. 돈을 대도 댈 사람은 옛 친구들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이고, 이 정부는 과거 10년의 두 정부와는 아무래도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을 법하다.
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도 그들을 훑어볼 기회를 가진 셈이다. 북측의 유화 제스처가 근본적이고 전략적 차원의 변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당국자들은 간파했을 것이다. 목구멍까지 숨이 깔딱할 지경이라 당장 고비를 넘길 돈을 빼먹기 위해 기술적 전술적 차원의 변화를 보이고 있음을 정부가 모를 리 없다.
핵 빠진 대화 모드 ‘앙꼬 없는 찐빵’
김정일 위원장을 다급하게 만든 것은 ‘퍼주며 달래기’가 아니었다. 북으로 들어가는 돈줄을 끊는 유엔결의 1874호, 이 결의 이행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리더십 발휘와 중국의 동참, 한미 간의 긴밀한 정책 공조가 북을 숨 막히게 한 것이다. 한미를 이간질하며 통미봉남(通美封南)하려다 미국이 막히니까 남한을 뚫어 위기를 모면하려는 계산도 훤히 읽힌다.
현대아산 개성공단 주재원을 넉 달 이상 억류하고는 숙식비 명목으로 2000만 원을 받아내고, 석방 대가로 옥수수 가루나마 몇십억 원어치 챙긴 그들이다. 이처럼 염치고 뭐고 없을 만큼 비참한 사정이 대화 모드, 유화 제스처의 뒷모습이다.
그럼에도 북은 핵 포기를 통한 근본적 활로 개척에는 마음이 없다. 정부는 김기남 등에게 ‘근본적 타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졌는지 모르지만, 이들이 평양에 돌아가 김 위원장에게 제대로 보고나 했을지 의문이다. 설혹 남측의 뜻이 김 위원장에게 전달됐더라도 지금 정도의 국제 압박만으로는 그를 근본적으로 바꿔낼 수 없을 것이다.
한국도 미국도 북한 비핵화를 부동의 목표로 삼는다면 대화 부재에 안달할 것이 아니라 북의 내성(耐性)과 나쁜 버릇만 키울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북이 사고를 치면 당근을 주며 달래는 것이 공식이었던 시대로 되돌아간다면 이 대통령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다.
물론 대화는 해야 한다. 그러나 북이 대화 국면을 주도하고 나올 때 더 냉정해야 한다. 김기남 일행이 고개를 숙였다고 이에 고무되지는 말 일이다. ‘순한 양’ 같은 표정을 짓는다 해도 당장 돈이 급해 그런 거다. 허겁지겁 다가가 호락호락 다룰 상대가 아니다.
북의 유화 제스처에 경계심을 보이며 근본적 대응을 얘기하면 남한 내 친북세력은 ‘냉전적 태도’니, ‘민족통일 역행’이니 덮어씌운다. 하지만 이들이 알고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북이 핵문제를 남북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기를 철저히 거부한다면 민족끼리의 진정한 상생도, 평화적 통일도 선전선동 구호일 뿐이다.
핵문제를 뺀 채 대화하고 도와주고 뒤통수 맞고, 대화하고 도와주고 뒤통수 맞기를 얼마나 더 반복할 건가. 지난날 그러는 사이에 북은 보란 듯이 핵실험을 거듭했고, 우리 국민은 그 핵을 이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운명이 됐다.
북이 핵을 버리면 2300만 주민에게 희망이 생긴다. 한국도 국제사회도 북의 정상국가화를 적극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핵무장을 고집하는 이상 주민들이 굶주림에서 해방될 길은 없는 것이 북한 체제다.
국민도 ‘원칙 견지’ 인내심 보여야
김정일 정권의 연명만을 도우려는 세력이 아니라면 한미 정부가 북에 대한 ‘핵 불용’ 정책을 일관성 있게 끌고 갈 수 있도록 응원해야 옳다. 금강산이 그리울지라도 관광객 박왕자 씨를 사살한 북이 진상규명, 재발방지, 신변보장을 당국 간 합의로 명시하지 않는 한 국민부터가 관광 재개를 거부해야 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정부는 국가 안보, 즉 자자손손 국민의 생명이 걸린 대북정책마저도 인기를 잣대로 조정하려 해선 안 된다. 집단적 정책 판단이 순간순간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여론 향배에 따라 덩달아 춤춘다면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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