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한국은행 총재를 맡아 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을 받았지만 고사했다. 2006년에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으로부터 후임 시장 출마를 권유받았지만 “자리를 보고 준비 없이 나가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사양했다. 2007년 초 범여권 대선후보로 합류해 달라는 통합신당모임 의원들의 손길도 “일회용 치어리더로 끝날 수 없다”며 뿌리쳤다.
그런 그가 이번에 이 대통령의 국무총리 지명은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정 내정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직을 고사한 뒤 “서울대 총장이 국무총리급인데…”라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분위기 좋은 자리에선 지인들에게 “대통령 한번 해보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권 일각에선 김영삼 정부에서 총리를 지내다가 김 대통령과 충돌한 뒤 사표를 던졌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대권 도전 과정에 정 내정자를 대입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YS를 들이받아 얻어낸 이 총재의 ‘정치적 성장’은 종국에 한나라당의 분열로, 나아가 대선 패배로 이어졌음을 정 내정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 내정자는 과거 이 총재가 갔던 길을 따라가지는 않을 것 같다. 총리지명 직후인 3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민감한 현안인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에 대해 “경제학자인 제 눈으로 보기에 (원안 추진은) 효율적 방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합도시를 세우되 충청분들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수정안으로 갈 것”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충청 표를 의식한 야당의 거센 반발에 여당인 한나라당까지 “우리 원칙은 원안 통과”(안상수 원내대표)라며 불끄기에 나섰지만, 그는 “발언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세종시 구상은 ‘수도 분할’ 그리고 ‘유령도시화’에 따른 비효율성 우려가 비등한데도 정치권이 대안 논의를 회피해온, 국가 장래가 걸린 난제다. 합리적 토론보다는 투쟁과 정쟁의 대상으로 변질된 지 오래된 사안이다. 충청 출신인 정 내정자가 ‘지역주의’와 ‘포퓰리즘’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충청권에 도움이 되고 국가 백년대계에 부합하는 대안을 마련하고 헌신적으로 국민을 설득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정치력과 용기와 리더십을 입증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야구광인 그는 “팀플레이를 하면서도 개인 기록과 팀 성적이 나오는 것이 야구가 갖고 있는 경제학 이상의 매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많은 국민은 중도실용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의 지명대타자로 나선 정 내정자가 사심을 버리고 오직 국정의 성과와 실적으로 승부를 내주기를 바라고 있다.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던 정 내정자가 과연 MVP감인지, 팀을 약화시킬 허상일지는 ‘세종시 마무리’를 지켜본 국민이 판가름할 것이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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