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명자]여성부 장관에 웬 영양학자냐고?

  • 입력 2009년 9월 8일 02시 56분


환경부 재임 시절(1999년 6월∼2003년 2월)의 일이다. 4대강 물관리 특별대책과 씨름하던 때 팔당 인근에 ‘김 아무개는 집에 가서 밥이나 하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 사라졌다. 정작 집에 가서 밥이나 해야 할 당사자인 나는 훗날에야 얘기를 얻어들었다. 장관에게 보고하기에는 민망스럽고 경황도 없었으리라.

獨메르켈 총리도 물리학자 출신

집에 가서 밥이나 하라는 말은 여성 운전자가 듣는 단골메뉴다. 아예 뒷유리창에 ‘밥하고 나왔어요’라고 써 붙인 애교 있는 차가 등장할 정도니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밥하는 일을 이렇게 비하한다. 집안 살림에 대한 가치관적 혼돈이다. 살림은 ‘살리다’의 명사형이고 살리다는 ‘죽이다’의 반대말이다.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사회 변동에 따라 여성의 영역은 집 바깥으로 나와 경제를 살리고 지역사회를 살리고 나라 살림에 참여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별나게 바뀐다고 해도 집안 살림은 여전히 중요하다. 밥하는 일은 결코 비하되어서는 안 될 기본이다. 아이들이 그 속에 있지 않은가.

이번 여성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얘기가 있는 듯하다. 여성정책과 양성평등 활동에 참여한 경력이 없고 기존의 관행과 다르다는 이유로 보인다. 여성정책에 웬 영양학자냐? 일견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런데 좀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이번 인선은 여성과학자의 발탁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 정부에 걸쳐 과학기술계는 정책결정에 참여하여 실질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젊은 과학도에게는 그런 열망이 더 커지고 있다. 이공계 기피가 국가적 난제로 떠오르고 여성과학자가 날로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고위직 롤 모델의 제시는 심오한 정책적 의미를 갖는다. 과학자가 연구결과를 실용화하여 사회적 효과를 창출하는 일은 상당한 행정역량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과학기술계에도 양성평등 활동이 있다. 딴 나라 얘기지만 글로벌 지도자의 큰별로 떠오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라이프치히대의 물리학 박사 출신이다.

정부 부처의 장관은 편제상 고유의 임무와 기능이 있다. 더 크게는 총체적 국정운영을 맡는 국무위원이다. 여성 관련 정책은 사실 모든 부처에 두루 분산되어 있다. 여성부 출범 때부터 논란을 빚었던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어차피 여성 관련 정책 기능을 한데 몰아올 수 없다면 모든 부처가 여성정책에 적극 동참하도록 조율하는 조정자(facilitator)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정운영의 비효율성은 부처 간 영역 다툼과 조정 기능 미흡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여성부는 이제 그동안 여성정책 전문가가 짜놓은 정책 틀을 중심으로 급격한 사회변동과 글로벌화 등 변수에 따르는 문제를 적시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더욱 스펙트럼을 넓혀 광범위한 정책수요층의 요구를 담아내고 고통받는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 실효성을 더욱 높여야 한다고 본다.

부처간 여성정책 조율 역할해야

장관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 필자의 경험에 비춰 보면 추진력 협상력 조정력 소신 전문성 등 흔히 말하는 요건이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전문가 시대에 장관의 제한된 전문성에 의존하기보다는 다양한 전문분야의 지혜와 경륜을 모으는 일이 최적의 솔루션이다. 모든 부문에서 리스크 관리가 가장 중요한 기능이 됐으므로 부처 업무 추진에서도 사전예방에 의해 리스크 관리를 잘하고 위기상황에 비용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장관으로서의 최고 덕목은 이 모든 기능을 소리 없이 추진할 수 있는 더 고차원적인 통찰력, 그리고 합리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거버넌스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1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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