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노주교 친일’ 재심요구
총독부의 강요로 친일단체 간부직을 맡아 황민화정책과 전쟁수행에 동원된 조선의 명망 있는 지도자는 대부분 친일행위자로 규정될 판인데 서울교구는 기준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즉 “친일 행위에 대해 일률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도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실제 내용을 감안해 ‘유형’ 혹은 ‘등급’으로 구분할 때, 더욱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울대교구는 “(노 대주교가) 몇몇 단체를 조직해 일제에 협력한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희생으로, 다른 친일 행위자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생전에 노 주교에 대해 “단순히 그런 것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그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김 추기경은 만일 그런 잣대로 친일을 규정한다면 자신도 학병을 갔다 왔고,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했으므로 이에 해당되지 않겠느냐고 친일파 선정 기준을 비판했다.
문제는 진상을 조사하는 측이 좌익인사에겐 관대하고 보수인사에게는 가혹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박헌영과 함께 좌익 양 거두 중 한 사람인 여운형이다.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유언비어 혐의로 경찰에 체포돼 전향서를 쓰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후 그의 이름으로 된 총독부기관지에 학병권유문이 몇 차례 실리고 경성일보사가 발행한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 같은 내용의 글이 게재됐다. 보수진영에서는 여운형이 친일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찬조연사,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 이름이 올랐다고 주장한다.
소위 진보좌파 세력은 여운형을 철저하게 변호한다. 학병권유문은 조작됐고 친일단체 관여설은 이름이 도용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 때문에 여운형은 노무현 정부 때 발족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의 조사 대상이나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드는 ‘친일인명사전’의 수록 대상 인물에서 제외됐다.
작가 김동인이 쓴 ‘여운형의 완장’
진보좌파의 주장에 의문을 갖게 하는 자료가 있다. 작가 김동인의 글이다. 작년 여운형의 독립유공자 표창 때 이를 반대하는 측이 공개했다. 김동인은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평남 영원(寧遠)에서 서울로 돌아왔더니 친지들이 대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고 시내는 전시 분위기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어떤 날 거리에 나가 보니, 거리는 방공연습을 하느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 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지르며 싸대고 있었다. 몽양 여운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뺑뺑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만 다 삭여버리고 말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신천지 1949년 7월호)
노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인사의 처신과 여운형의 처신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가 서울대교구의 재심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친일행위 판정에 가장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형평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시욱 언론인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