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진은 경영 적자와 ‘PD수첩-광우병편’ ‘100분 토론’ 등에서 드러난 게이트키핑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엄 사장 교체 의사를 내비쳤다. 이달 초 D―데이가 잡혔다는 말이 돌았고, 새 사장 후보들도 바빠졌다. 하지만 엄 사장이 경영 인사권에 개입할 수 있는 노조의 단협 개정을 비롯한 혁신 플랜을 내놓자 방문진은 이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방문진이 방향을 바꾼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이 친서민 중도실용 행보로 지지도가 오르는데 MBC 건이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는 게 한 이유인 듯하다. 새 사장 후보군에서도 적임자가 보이지 않는다. ‘MBC=노영(勞營)방송’이라고 할 만큼 막강 노조에 맞서 ‘장렬히 전사할 만한’ 강단과 전략을 지닌 이들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장렬히 전사하라는 말은 백낙청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인이 지난해 6월 사퇴 압력을 받던 KBS 정연주 사장에게 전화로 전했던 격려 발언이기도 하다)
임기가 1년 반 남은 엄 사장을 곧장 교체할 경우 좌파 언론운동권이 ‘엄기영 구하기’ ‘MBC 지키기’를 이슈로 촛불시위를 벌일 텐데 굳이 그 빌미를 줄 까닭이 없다는 인식도 한몫한 듯하다. 정연주 전 사장은 8월 말 엄 사장에게 편지를 써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스스로 물러나지 말라”며 “한국 방송의 마지막 보루인 MBC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 편지는 좌파 운동권에게 내리는 비상대기령 같았다.
김민웅 성공회대 겸임교수도 11일 ‘최문순 정연주 엄기영 삼각편대 떠라’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최문순은 의회 현장에서, 정연주는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엄기영은 방송사 현장에서 서로 힘을 합치길 기대한다”며 “최문순은 언론운동의 의회 파견대원이기 때문에 정연주와 임무 교대하고 국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엄 사장이 졸지에 좌파 운동권의 전위로 기대받는 꼴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엄 사장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최 의원, 정 전 사장과 엄 사장이 스크럼을 짠다면 ‘이가 빠진 동그라미’ 같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운동’에 앞장서 왔지만 엄 사장은 그런 적이 없고 세련된 신사의 이미지가 이어진다. 엄 사장은 흐름을 거스르고 자신을 고집하는 편도 아니다. 2005년 사장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그는 노조위원장 출신의 최문순 당시 부장이 노조의 지지를 업고 떠오르자 후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최 사장이 임기를 마치자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은 춘천고 선후배 사이다.
MBC 내부에서 엄 사장은 사내 권력 서열 20위 안에 못 든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노조 출신 간부들과 노조의 보이지 않는 손이 MBC를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엄 사장이 좌파 운동권으로부터 ‘투쟁 동참’을 제안받으면 개운찮을 듯하다. MBC의 한 간부는 “정 전 사장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하나로 묶이니 어색해한다”고 말했다.
엄 사장이 내놓은 혁신 플랜의 핵심은 단협 개정과 프로그램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안이다. 엄 사장은 최근 “시대 변화에 따라 노조의 역할도 변해야 한다”고 공언했으나 노조가 20여 년간 다진 기득권을 선뜻 포기할 리 없다. 엄 사장의 스타일도 밀어붙이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엄 사장의 혁신 플랜은 어떻게 나아갈까?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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