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일제강점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81)는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이날 대사관 앞에는 일제피해자단체총연합회,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 4개 단체 회원 30여 명이 일본 정부에 1965년 타결된 한일회담 문서의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 발언자로 나선 이용수 할머니는 2006년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일협정문서 전면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공동원고 중 한 사람이다. 그동안 일본은 한인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가 있을 때마다 “한일회담을 통해 1965년 체결한 ‘한일협정’으로 모든 청구권은 소멸됐다”며 외면해 왔다. 그런 일본의 총리 취임을 이 할머니가 축하하고 나선 것은 11년 전 하토야마 총리와의 인연 때문이다.
1998년 여름 이 할머니는 일본 방문길에서 일본 시민단체의 소개로 신생 야당인 민주당의 하토야마 간사장을 만났다. 당시는 일본의 민간기구(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가 나서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다. 이 할머니는 하토야마 간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없이 민간에서 주는 배상금은 받을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
이 할머니는 하토야마 간사장이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성의를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 할머니는 “면담을 마치고 악수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2000년 방문 때에도 일본 국회의원의 주선으로 하토야마 의원과 통화하며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토야마 총리의 이런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 할머니는 16일 출범한 하토야마 정권이 한일회담 문서공개 문제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7년과 2008년 일본 외무성이 6만여 쪽의 한일회담 문서를 공개했지만 주요 내용은 먹칠로 지워져 있었다. 그는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 하토야마 총리가 한일회담 문서를 연내에 전면 공개하는 결단을 내려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우애의 정치 철학을 강조해 왔다. 11년 전 신생 야당의 간사장으로서 했던 약속이 총리 자리에 오른 뒤에도 지켜질지 궁금하다. ‘자리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말이 이번만은 부디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우정열 사회부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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