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우정열]상봉가족 손에 오빠이름 꼭 쥐여 준 ‘78세 여동생’

  • 입력 2009년 9월 25일 02시 50분


“나이든 마누라가 저리도 애를 태우고 있으니 이번에는 처남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종영 씨(78·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음성은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의 심정 같은 절박함이 느껴졌다. 이 씨는 기자가 쓴 기사(본보 22일자 A14면 ‘북에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니…’)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이 씨는 이 기사에 소개된 전향자 씨(62·여)의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전 씨는 6·25전쟁 당시 실종된 아버지가 북한에서 생존한 것이 확인돼 26일부터 금강산에서 열리는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감격의 부녀 상봉을 앞두고 있어 지면에 그 사연이 소개됐다.

연락처가 필요한 이유를 묻자 이 씨는 부인 윤정헌 씨(78)의 친정 오빠 윤순헌 씨(85)가 6·25전쟁 때 실종된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1950년 당시 서울대 화학과 4학년생이었던 윤순헌 씨는 전쟁이 터지자 “서울 하숙집에 보관해 놓은 책을 가져오겠다”며 경기 용인시의 고향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최고 대학 졸업을 앞둔 장남의 실종에 윤 씨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다고 한다.

이 씨는 “전 씨의 아버지도 실종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대학생이더군요. 처남과 비슷한 배경의 분이라서 행여 처남 소식이라도 알까 싶어 전 씨가 아버지를 만날 때 대신 여쭤봐 달라고 부탁하려 합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를 통해 이 씨 부부의 사연을 전해들은 전향자 씨는 흔쾌히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줘도 좋다고 했다. 이 씨 부부는 24일 직접 전 씨의 집을 방문해 윤순헌 씨의 실종 사연을 자세히 전했다. 이에 전 씨는 “아버지를 만나면 윤 씨 소식을 꼭 물어 보겠다”고 약속했다. 이 씨는 “동병상련이라 그런지 아내와 전 씨가 서로의 기막힌 사연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많이 쏟았다”고 전했다.

롤러코스터처럼 기복이 심한 남북관계가 일시적으로 개선될 때만 100명, 200명씩 이벤트처럼 잠시 만났다가 재회의 기약 없이 생이별을 하는 현재의 구조는 바람직하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상봉의 정례화와 규모의 확대가 가장 좋겠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산가족의 생사 확인이라도 가능케 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남북 당국이 오늘부터라도 힘과 의지를 모았으면 한다. 대부분이 70, 80대 고령의 이산가족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을 뜨는 분들이 많아 안타까울 뿐이다.

우정열 사회부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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