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참전 美노병의 10년 모금
그 뉴스와 더불어 이명박 대통령이 방미 길에 피츠버그의 ‘6·25전쟁 참전용사 기념비’에 헌화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신문 귀퉁이에 실렸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노병 에드워드 스티븐스 씨(76)가 전몰장병 추모 프로그램에 6·25전쟁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데 섭섭해 10년간에 걸친 모금 끝에 120만 달러를 모아 1999년 9월 세운 기념비였다. 우리가 절박한 처지에 몰렸을 때 도와준 우방의 고마운 뜻을 뒤늦게나마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다웠다.
그렇다. 6·25전쟁은 과거 59년 전 동북아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났기에 미국 국민의 뇌리에는 까마득한 지난날의 전쟁으로, 그 전쟁에 참전했던 노병 외에는 이미 잊혀진 게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을 이 땅에서 직접 겪었던 우리는 어떠한가.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전후 세대는 전쟁의 기억이 있을 리 없으니 조부모님 세대가 그 시절 고생담을 한탄삼아 읊조리는 회고담으로 들릴 것이다. 장년층 이하 세대는 개인적인 일상에 쫓기며 살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매스컴을 타면 그제야, 우리가 아직 분단국가로서 이산의 고통이 현존하구나 하는 정도로 느낄 터이다.
6·25전쟁 전후의 참담했던 우리네 삶을 40여 년 동안 소설로 써 왔으나 이제 그 열정도 식은 나이가 되고 보니 젊었을 때 쓰려다 추체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포기했던 소재가 새삼 떠올랐다. 1950년 11월 하순, 중공군 6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격에 밀린 미 제1해병사단과 7사단 소속 2개 대대 10만5000 병력이 해발 1400m 준봉의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長津湖) 일대에서 후방 60리에 위치한 흥남항으로 철수하는 실제 과정이 글 소재였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며 벌인 15일간의 철수작전이야말로 혈로를 뚫는 죽음의 길이었다. 미군 어느 중대는 176명 중 120명의 전사자가 났으니 처참한 후퇴과정을 짐작할 만하다. 그 결과 흥남부두에 몰려 발을 동동 구르던 피란민 10만여 명까지 ‘흥남 철수작전’을 통해 미군 함정편에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장진호 철수작전’은 사지에서 탈출한 부대가 비단 미군이 아닌 국군이나 적군일지라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향한 극한의 강행군 끝에 이뤄낸 인간승리라 할 것이다. 그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병사라면 59년 세월이 흘렀어도 옥죄어온 죽음의 공포 속에 동상으로 생살 떨어져나간 그해 겨울 동토의 한국 산야를 잊을 수 없으리라. 스티븐스 씨가 장진호 철수작전에서 살아남은 노병이라면 그해 혹한 속에 죽어간 전우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6·25전쟁을 잘 모를 수 있고 자유가 당연히 주어진 것이라고 알지만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스티븐스 씨의 이 말은 미국 젊은이에게 던진 경종이 아니라 우리 젊은이들이 꼭 새겨야 할 말이다. 6·25전쟁은 남북한 모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우방의 도움과 우리 국민의 피땀이 있었기에 반쪽이나마 지켜냈고, 그 후손이 오늘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전쟁이 주는 가혹한 비극성, 자유와 인권과 밥의 소중함을 깨치기 위해서라도 젊은이들은 6·25전쟁이 남긴 뼈아픈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김원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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