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빙벽 개척’ 혹시 남극 파병은…

  • 입력 2009년 9월 29일 20시 14분


2008년 2월 24일 낮 12시. 남극 킹조지 섬의 세종기지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 이명박 대통령이에요.” 수화기를 든 홍종국 대장은 뜻밖의 전화에 깜짝 놀랐다. 그때 한국 시간은 25일 0시 정각을 조금 지났다. 임기 시작 직후 이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로서 합참 지휘통제실에 이어 두 번째로 세종기지에 전화를 했다. 외로움과 추위와 싸우던 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폭행사고보다 큰 걱정은 ‘아라온’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과학자들이 먼 남극까지 나가서 근무하는 것은 국력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이라며 “과학 강국이 되도록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1분 남짓 짧은 통화였다. 그러나 20여 명의 연구원과 대원에겐 큰 격려와 위로가 됐다. 이들은 이날 평소 같으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늦은 시간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통령 취임식을 YTN 위성방송으로 지켜보았다.

성년을 갓 넘긴 세종기지에서 최근 불미스러운 사고가 났다. 그래선지 오랜만에 만난 윤석순 극지연구진흥회장의 얼굴빛은 어두웠다. 폭행사태가 언론에 보도된 뒤 극지연구소 게시판에는 비난 글이 쇄도했다. “그 일 때문이냐”고 물어봤다. 윤 회장은 “진상을 규명해 문책할 사람은 문책하면 되지만…” 하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취항을 앞둔 쇄빙선 ‘아라온’호에 쏠려 있었다.

아라온호는 길이 111m, 폭 19m(6950t급)로 최고속도 16노트(시속 30km)의 연구쇄빙선이다. 60여 종의 첨단 연구장비와 헬기 및 승무원 25명과 연구원 60명을 태우고 두께 1m의 얼음을 3노트로 쇄빙하며 70일간 2만 해리(3만7000km)를 항해할 수 있도록 건조된 최첨단 선박이다. 한국은 최고의 기술력을 지닌 조선 국가로 손꼽힌다. 그러니 하드웨어는 안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은 장비가 아니라 사람이 한다. 극지항해사나 빙항법사 같은 전문인력 양성프로그램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얼음을 깨며 실전에서 하나하나 배워야 한다. 또 세종기지보다 더 좁고 열악한 선상에서 오랜 기간 지내다 보면 고립감, 불안감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동료끼리 부닥칠 수도 있다. ‘불상사가 재발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그의 표정에서 읽혔다.

인간이 남극과 같은 극한의 자연환경을 거스를 수는 없다. 때로 과감하게 극복하고, 때로는 슬기롭게 순응할 뿐이다.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을 비롯한 20개 남극기지 보유국들은 연구대원을 극한지 체험자들로 뽑는다고 한다. 특히 위험한 쇄빙선 운영은 해군에, 헬기를 비롯한 항공기는 공군에 맡긴다. 기지 건설이나 운영도 과학자 보호를 위해 현역 군인이 맡는 예가 많다.

위험한 작업엔 군지원 필요

일본 해군 관찰대가 남극의 얼음에 고립됐을 때 러시아 해군 쇄빙선이 구조한 일도 있다. 외국이라도 해군끼리는 서로 통하기 때문에 위기상황에서 이같이 쉽게 소통할 수 있다. 또 우리 해군도 쇄빙항해 등 극지 작전경험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위험한 남극의 결빙해역을 항해할 아라온호에 단 몇 명이라도 해군이 승선했으면 하는 속내를 윤 회장은 비쳤다.

그는 세종기지 건설 때(1987∼88년)의 일화를 털어놓으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전두환) 대통령께 ‘군 공병대가 지원해야 일이 굴러갈 것 같다’고 건의하니 ‘안 그래도 군사독재라고 말이 많은데, 남극까지 군인들이 해먹는다고 하지 않겠나. 현대건설에 얘기해 막 제대한 사람들을 보내면 되잖아’라고 한마디로 정리해버렸다.”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회장이었을 때 세종기지는 완공됐다. 그래선지 그는 미래 자원의 보고인 남극에도 관심이 깊다. 쇄빙선과 2012년 건설될 남극 대륙의 제2기지 운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라온호의 안전운항 경험 축적은 꼭 필요하다. 함께 지혜를 모을 때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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