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환수]스포츠와 수학

  • 입력 2009년 10월 2일 02시 45분


수험생들에게는 참으로 괘씸한 말이겠지만 기자는 학창 시절에 수학이 가장 쉬웠다. 문제가 곧 답이니 틀릴 일이 없었다. 속셈도 조금 돼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함께 월세 살던 아저씨가 운영하는 주산학원에 놀러갔다가 주산 놓는 법도 모르면서 초단 자격증을 떡하니 들고 왔다. 그보다 2년쯤 앞서서는 대학생 형들이랑 카드 게임인 마이티를 해서 동전을 꽤나 벌었다. 이쯤 말하고 보니 주위에서 쏟아질 따가운 시선에 벌써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어떡하랴. 다 사실인 것을. 그래도 신은 공평했던지 기자는 왜 말레이시아에 주석이 많이 나고,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는지 받아들이기 무척 힘들었다.

기자의 편향된 재능은 체육 기자를 하면서도 많은 도움이 됐다. 야구 선수의 타율이나 평균자책을 계산기 없이 척척 해내니 선배들이 무척 귀여워했다. 축구의 조별 예선이 벌어지면 본선 진출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은 기자의 몫이었다. 냉전이 끝나자 일자리를 잃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이 뜻밖에도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인 월가에 대거 진출했던 것처럼 수학은 스포츠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기자의 눈으로 볼 때 이제는 프로야구단 LG의 전 감독이 된 김재박 씨가 지난달 말 보여준 박용택의 타격왕 만들기는 허점투성이였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그라운드의 여우’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지난달 22일 현재 박용택의 타율은 0.374였고 롯데 홍성흔은 0.372였다. 홍성흔은 25일 LG전 한 경기만 남겨둔 상황. LG 투수들은 그날이 오자 기다렸다는 듯 홍성흔에게 첫 타석부터 볼넷을 남발했다. 결국 홍성흔은 4연속 볼넷을 얻은 뒤 아쉽게 범타로 물러나긴 했지만 마지막 타석에서야 방망이를 공에 갖다 댈 수 있었다. 반면 박용택은 이날까지 두 경기에서 타석에 서지 않았다. 이에 언론과 수많은 팬은 김 전 감독을 향해 집중 포화를 날렸고 인화를 중시하는 LG그룹의 이미지에도 큰 흠집이 났다.

김 전 감독은 어차피 떠나는 마당에 ‘비난은 순간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는 야구계의 잘못된 경구를 떠올렸을 터. 하지만 비난은 피하고 기록은 만드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분명 있었다. 25일 경기 전까지 박용택과 홍성흔의 타율 차이는 반올림한 값으로는 0.002였지만 정확한 값으로는 0.0024였다. 홍성흔은 이날 첫 타석에서 곧바로 안타를 쳐도 박용택에게 0.0009가 뒤지고, 3타수 2안타를 쳐도 0.0003이 모자란다. 그렇다면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하겠지만 처음부터 홍성흔과 정면승부를 펼쳐도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운이 좋아 홍성흔이 4타수 1안타나 2타수 무안타, 그 이하의 성적으로 끝난다면 박용택은 마지막 경기인 26일 히어로즈전에서 4타수 무안타를 쳐도 되니 9회에 벤치가 아닌 그라운드에서 떳떳하게 시즌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었다.

이날 3타수 무안타가 되자 빠졌던 박용택은 사흘 뒤인 29일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인 쌍둥이 마당에 ‘야구를 사랑하시는 팬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올렸다. 그는 “마지막 순간 잘못된 선택을 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경쟁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타율이 앞서 있었는데도 22일 히어로즈전에 나가 4타수 무안타를 친 홍성흔도 그렇지만 박용택도 멋있다.

김 전 감독이 계산기를 조금만 더 두드려봤더라면…. 다시 부아가 치민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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