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경란]엄마 냄새, 그리고 달

  • 입력 2009년 10월 2일 02시 45분


그동안 가장 열심히 해온 일이 글쓰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글을 쓰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했는지 모른다. 나는 맏딸이어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제사나 명절에 엄마를 도와 음식준비를 하곤 했다. 다행히 그게 나름대로는 적성에 맞는 일이어서 그렇지, 안 그랬더라면 집 떠날 궁리를 일곱 살 때부터 했을 것이다. 서른이 넘은 후부터는 특히 명절이 싫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부모님과 멀뚱멀뚱 앉아 안 넘어가는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며 먼 친척에게 상을 차려내야 하는 일, 며칠 전부터 손이며 다리가 퉁퉁 붓도록 일하는 엄마를 지켜보는 일 모두 고역이었다.

이맘때 몇 번인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같은 것에 참여하느라 외국에 머물렀다. 이상한 해방감 같은 게 느껴졌지만 나도 없는데 누가 전을 부칠까, 엄마 혼자 장을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추석날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시내에 나가 밥을 먹고 있을 때조차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동생들은 언니가 없는 친정이 너무 불편하다며 편지를 보냈다. 집에 있으나 다른 도시에 체류할 때나 언제나 엄마가 마음에 걸린다는 걸 느끼게 됐을 때는 이미 엄마는 늙어 있었고 나도 마흔 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조카가 유아원에서 송편을 만들기로 했다며 한복을 입고 라면봉지 한가득 쌀을 담아 갔다. 어이구, 이놈이 언제 이렇게 컸나! 현관 앞에서 엄마가 혼잣말을 했다. 조카는 쑥쑥 커가고 엄마는 늙어가는 집에서 나는 어쩐지 무릎이 꺾이는 느낌이다. 이제 집을 떠나기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 떠나더라도 엄마만큼은 다치지 않게 잘 포장하여 내 이삿짐 속에 소중히 담아가야 한다는 생각. 하루 종일 명절 음식을 준비하다 나는 쌀쌀맞게 쏘아붙인다. 엄마, 절대로 아프면 안 돼! 그게 나를 도와주는 것 알지? 거의 윽박지르듯 말이다.

모든 사람한테는 각각 고유한 냄새가 난다. 과일장수한테서는 단내가 나고, 생선장수한테서는 짭조름한 비린내가 나고, 잘 맡아보면 간호사 교사 스튜어디스에게서도 각각의 냄새가 난다. 명절을 앞두고 지금 집 안에 풍기는 이 냄새. 나물 볶는 냄새와 배추 냄새, 생선 찌는 냄새, 하얀 햅쌀의 냄새, 어린 조카의 침 냄새 땀 냄새, 이 모두를 다 섞어놓은 것이 엄마의 냄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송편이 아니라 조카가 유아원에서 가져온 것은 집을 그린 그림이었다. 조카가 그린 집은 터무니없이 큰 데다 원근감도 전혀 없지만 창문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풍선도 굴뚝처럼 집 양쪽에 달려 있다. 사람 열한 명이 양팔을 벌려 손을 맞댄 채 집 앞에 서 있다. 조카는 단풍잎 같은 손으로 한 사람씩 짚어가며 이건 할머니 할아버지, 이건 큰이모 하며 신이 나서 설명한다. 막내 부부가 들으면 섭섭해 할지 모르지만 조카를 키우다시피 한 사람은 엄마와 나다. 그 그림을 든 채 엄마와 나는 무슨 대단한 상장이라도 받은 듯 우쭐한 느낌이다.

저녁에 달을 보러 나가는 엄마를 조카를 안고 따라 나갔다. 저 달에도 냄새가 있을까? 이제 너무 무거워진 조카를 쩔쩔매고 다시 고쳐 안으며 나는 생각한다. 있다면 틀림없이 엄마한테서 나는 이 냄새일 것 같다. 그러나저러나 어느새 벌써 추석이 되었으니 올해도 집을 떠나기는 틀린 모양이다. 앞으로 언제 집을 떠나든, 얼마나 엄마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든 마치 얇은 벽처럼 한쪽 팔을 쭉 뻗으면 손은 엄마에게 가 닿을 것 같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듯한, 둥글고 환한 저 장엄한 달처럼.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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