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위, 정책지향성 분명히 밝혀야
초기자본이 수천억 원이고 연간 유지비용이 또 수천억 원이라는데 그만한 돈이 있느냐 하는 자본능력에서부터, 신문이 영상을 아느냐 하는 핵심 역량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질문이 나돈다. 드라마 쇼 코미디 스포츠 등 이런저런 잡다한 콘텐츠를 한데 섞는 방송과 달리 신문은 오로지 뉴스 하나에만 매달리는 기업이니 충분히 나올 만한 질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법 도입의 정책적 지향성을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는 미디어법을 통과시키면서 방송의 다양성과 미디어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라고 외쳤다. 신문의 방송참여 길을 터준 명분이다. 위의 궁금증에 대해 정책적으로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명분은 퇴색하고 반대론자의 음모론을 정당화해주는 꼴이 된다. 요컨대 허가기준에서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준을 정책으로 제시해 새로운 미디어산업의 구조를 구축할 수 있게 하라는 얘기다. 기업은 그 틀 안에서 전략을 추진하고, 거기서 정부가 바라는 방송의 다양성이나 산업적 성장이라는 성과가 나올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정부가 미디어법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환경의 등장을 그토록 주장했다면 그 해답 또한 새로운 내용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문이 방송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면, 신문다움이 배어 있는 방송을 끌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허가권자인 방송통신위원회는 다양성을 컨소시엄의 다양성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높다. 신문사가 컨소시엄 구성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협력자를 통해 종합편성의 역량을 과시할 것이다. 그러나 위원회는 액면의 다양성이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점을 신청자에게 명확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액면 가치를 경제적 사회적 성과로 구성해내는 것이 본질임을 정책적으로 설명하라는 말이다. 신문이 생산해내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얘기다.
신문기업이 초점을 맞췄던 전통적인 가치는 독자가 최종상품인 신문에서 얻는 혜택이었다. 이 논리는 독자는 신문의 소비자일 뿐이라고 전제한다. 새로운 접근은 ‘독자=소비자’라는 등식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독자가 신문의 수혜자이지만, 가치를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는 뜻이다. 뉴스가 정보화한다는 말은 이미 진부하지만 독자가 정보를 스스로 생산한다는 새로운 발견의 사례는 찾기 어렵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신문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은 전통적인 신문뉴스를 벗어나 좀 더 다양해질 수 있다.
콘텐츠 생산-공급과정의 네트워크
또 가치를 상품에서만 찾지 말고 네트워크에서 찾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상품가치는 소비가 끝나면 사라진다. 저널리즘은 대화라고 한다. 대화의 새로운 가치는 대화의 범위를 넓히고 오랫동안 지속하는 과정에서 창출된다. 독자의 네트워크는 이 때문에 중요하다. 네트워크의 형성만으로도 신문은 또 다른 사회적 성취를 이룬다. 네트워크는 또 다른 가치인 셈이다. 이런 네트워크는 콘텐츠 생산의 여러 단계에 적용할 수 있다. 정보의 수집, 정보의 가공, 정보의 번들링, 정보의 배포 등 모든 콘텐츠의 공급단계에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콘텐츠를 좀 더 다양한 형태로 조직해낼 수 있다. 네트워크는 경제적 성취로도 연결될 수 있다.
종합편성은 신문기업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수준의 공급력을 요구한다. 컨소시엄 참여자끼리의 협력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시장에서는 경쟁자든 협력자든 영원한 관계는 없다.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이른바 경협(coopetition)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경협전략은 복잡한 전술적 준비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 나도 알고, 남도 알고, 내가 줄 것과 상대방이 내놓을 것을 알아야 하고, 서로 관계하는 독특한 룰도 만들어야 하고, 어디까지 같이 갈지를 정해야 한다. 조합에 따라 만들어지는 새로움은 한계가 없을 것이다.
신문기업이 자신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내놓을 수 있다면 이는 저널리즘이라는 신문기업의 본질에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위원회는 이런 접근이 가능하도록 정책으로 울타리를 쳐주어야 한다. 디테일에 빠지다 보면 원래 목적이 가려질 수 있다. 디테일은 주로 사업자에게서 나오는데 대부분 자기이해에 매달리는 이야기이다. 과거 경험에서 보듯이 정부가 정책적 지향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결국 사업자만을 위한 사업에 그치게 된다. 정부가 중심을 잡아야 사회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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