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2인자는 없다

  • 입력 2009년 10월 15일 02시 58분


“대권에 관심이 없다. 총리 일을 하기에도 벅찬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겠나?”

정운찬 국무총리가 취임식을 마친 뒤 첫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하지만 ‘대권에 관심 없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 총리는 2007년 대선 출마를 저울질했었다. 그런 그가 2년 만에, 그것도 ‘국정의 2인자’로 불리는 총리 직에 오른 뒤 ‘대권 관심’이 없어졌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기야 정 총리가 반대로 “대권에 관심이 있다”고 했거나, ‘대권 관심’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파장이 훨씬 커졌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대권, 혹은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대’ 자도 꺼내기 어려운 게 한국적 대통령제 아래의 총리라는 자리다.

어디 한국뿐이랴. 한국과 권력구조가 가장 비슷한 프랑스 전직 총리들도 ‘총리는 까다로운 유권자와 거만한 대통령 사이에 끼인 신세’라고 토로했다고 르몽드는 보도했다.

한국의 전직 총리들은 어땠는가. 정 총리처럼 대권을 꿈꿨던 전직 가운데 대조적인 행보를 보였던, 대표적인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이회창, 이홍구 전 총리다.

이홍구 전 총리는 원만한 인품과 포용력, 소통능력으로 김영삼 정부 통일부총리를 거쳐 국무총리가 돼서도 부드럽게 내각을 이끌었다. 하지만 ‘2인자’ 때까지 베스트였던 그가 ‘차기 1인자’, 즉 대권을 꿈꾸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총리로서, 당 대표로서 1인자(김영삼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던 그는 김 대통령의 낙점을 받으면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할 것으로 판단했던 듯하다. 1인자의 뜻을 받아 ‘노동법 날치기’를 주도했던 그는 결국 대권가도에서 밀려났다.

반면 이회창 전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각을 세워 취임 4개월여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1996년 15대 총선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된 뒤에도 사실상 김 대통령을 압박해 이듬해 신한국당 대표 자리를 쟁취한 뒤 당 대선후보에 올랐다.

판이하게 대비되는 ‘이홍구형(型)’과 ‘이회창형’ 총리. 정 총리는 어느 쪽을 택할까? ‘국정 2인자’에 만족하려면 ‘이홍구형’을 택하는 것이 본인이나 국정의 안정을 위해서 낫다. 그러나 1인자를 꿈꾼다면 ‘이홍구형’은 답이 될 수 없다. 기본적으로 권력은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회창형’은 어떨까? 현재로선 위험천만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이회창 총리가 대통령과 각을 세울 때는 그만한 ‘정치적 자산’이 있었다.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을 거치면서 쌓은 ‘대쪽’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정 총리는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그나마 갖고 있던 ‘정치적 자산’마저 까먹었다.

정 총리는 ‘이홍구형’과 ‘이회창형’을 절충한 ‘정운찬형’ 총리가 되려는 듯하다. 그 자신도 “정운찬형 총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면 설득할 용의는 있지만, 밖에 표출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디 말처럼 쉬운가. 지난 정권에서 대통령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현 국정운영 시스템상 대통령과 총리가 생각이 다를 경우 총리가 대통령을 설득할 여지는 없다고 봐도 좋다”며 “잘못했다간 역린(逆鱗)으로 비치기 십상이다”라고 말했다.

현 상황에서 정 총리에게 ‘2인자 프리미엄’은 없다. 그가 이를 마음에 새기고 매사에 겸허하되, 철저하게 일로 승부했으면 한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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