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11>임시정부와 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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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0일 03시 00분


“우리 정부가 있다”
독립운동의 중심체
목숨 던진 항일활동

환국 이틀 전인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 김규식 신익희 이희영 등 임정 요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환국 이틀 전인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김구 김규식 신익희 이희영 등 임정 요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상해림시정부에서는 금번 아래와 가튼 취지로 상벌령(賞罰令)을 제뎡하야 각 독립단에 통고를 발하였다더라. 대한독립군으로 조선내디(內地)의 일본관텽을 습격하다가 전사한 사람은 일등상패를 주고 유족에게는 계급을 보아 이천원 이하의 일시금을 줄 일이오….”
―동아일보 1922년 10월 15일자》

한일강제병합 전후 해외로 흩어져 민족의 독립을 모색한 독립운동가들은 차츰 중국 상하이를 활동의 중심지로 삼기 시작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조계(租界)가 있어 일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 3·1운동이 일어나자 이곳에 결집돼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의 불길을 확산시키기 위한 정부수립계획이 실행에 들어갔다.

1919년 4월 13일 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은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을 선포했다. 한민족의 정통을 계승한 정부이자 헌법과 의회제도에 기초한 민주공화정 정부였다. 임시정부는 기관지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한편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1년 2월 27일 동아일보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2단 사진과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동휘 등 내각 전원의 명단이 소개됐다. 일제의 압정 속에서 조선인들에게 전해진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정부가 있다”는 소식은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임시정부의 비밀 군사조직인 의열단도 일제 고관 암살, 관공서 폭탄공격 등의 활동을 펼쳤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비밀결사대로 활동하다 체포된 임정 관련자들의 공판 소식이 동아일보 지면에 연이어 전해졌다.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해 독립운동을 하던 향촌회원 검거, 강서군에서 김려련 검거’(1921년 5월 3일), ‘상해임시정부의 외교총장 박용만의 부하, 각종 건물을 파괴키 위해 조션내디에 수입하랴든 폭탄 이십 개와 함께 톄포’ (1921년 7월 23일) 등의 기사다.

1923년 1월 12일에는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경찰서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예닐곱 명이 부상했다. 김 의사는 22일 새벽 은신처를 덮친 무장경찰 400여 명과 대치한 채 도심에서 혈투를 벌이다 자결했다. 동아일보에는 두 차례에 걸쳐 사건의 전모가 실렸고 다음해 한식에는 김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가 아들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는 모습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 ‘죽으로(죽으러) 왜 왔더냐 묘전(墓前)에서 통곡하는 김상옥의 친모’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아! 가슴에 품은 그 뜻은 어디 두고 이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누웠느뇨.”

이후 광저우 충칭 등으로 청사를 옮기면서 민족의 정부로 역할을 수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올해 수립 90주년을 맞았다. 해외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봉환, 기념 학술대회 등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한 여러 사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중국의 도시개발로 없어질 위기에 처한 임정 유적지 문제 등 여러 현안은 독립운동사에 대한 우리의 더 큰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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