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물투표는 이전에 도모지 업든 일이 될 뿐 아니라… 십일 정오까지 본사에 도착한 뎨 일회의 투표결과는 아래에 긔록한 바와 가치 실로 현재 조선인 중에 각 방면을 모도 망라하야 진실로 흥미가 매우 찐하며…’ ―동아일보 1923년 5월 11일자》1919년 3·1운동으로 불붙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열기는 1920년대 내내 이어졌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조선인들의 관심사였다.
국내 민족지도자들은 주로 교육과 종교, 기고 중심의 활동을 펼쳤다. 최남선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동명사(東明社)’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잡지 ‘동명’을 발간했다. 이상재는 1921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교육협회장 자격으로 참가하는 등 기독교와 교육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는 등 교육 관련 사업에 힘을 쏟았다.
해외에서는 이승만 서재필 안창호 이동휘 김좌진 등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1년 6월 9일 동아일보에는 ‘독립당 대합동설-두목들이 상해에 모혀 결의’라는 제목으로 안창호 여운형 등이 모여 각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논의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승만은 외교를 통한 조선 독립에 주력했다. 김좌진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대승해 조선인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1923년 5월 15일 지령 1000호를 맞아 동아일보가 실시한 ‘현대인물투표’는 이 같은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가장 인망(人望) 있는 현대인물을 뽑는다’는 취지로 5월 11일부터 열흘간 회답을 받고 매일 그 결과를 지면에 발표한다는 계획이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이자 민족지도자 지명도 투표인 셈이다.
‘현대인물투표-대환영의 신시험, 자미잇는 인물투표의 시작’(1923년 5월 11일) 기사는 ‘(투표를 두고) 일반사회에서 긔대가 심히 간절한 고로 요사이 어느 곳에를 가든지 이 인물투표가 반드시 리약이 거리가 되는데…’라며 투표 첫날 분위기를 전했다.
첫날 투표 결과 이승만이 49표로 1위, 최린 25표, 안창호 22표, 최남선 18표, 서재필 17표, 이춘재 12표, 이상재 10표, 이동휘 7표, 여운형 강일성 각 6표, 이승훈 김원봉 윤상은 신흥우 각 4표, 김좌진 3표가 나왔다. 오늘날 잊혀진 이름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독자들이 받아든 지면에는 투표 결과가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치안에 방해된다’며 명단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결국 투표도 중단됐다. 4년 뒤인 1927년 11월 다시 실시한 현대인물투표 결과도 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주권을 상실한 시대에는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여론조사는 주요 선거와 각 정당의 정책 수립 등에 폭넓게 활용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실시간 인기 검색어’를 통해 매 순간 인기 있는 인물과 화제를 공개한다. 그러나 조사 만능의 세태가 불러올 대중 영합주의나 인기 우선주의의 폐해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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