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실용으로 전향한 이명박 정부가 좌파정권도 못했던 수월성(秀越性)교육의 폐기를 드디어 실현할 모양이다.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이 외국어고를 특성화고교로 바꿔 추첨으로 뽑자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초안을 내놨다. 우수학생들이 몰려 ‘엘리트’(정 의원 표현)를 양성했다는 외고를 사실상 폐지하는 것과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 때 외국어고 옥죄기에 나섰다가 1년 반도 못돼 물러난 김진표 전 교육부총리만 억울할 판이다.
外高추첨, 그 다음은 자사高?
국회 교육과학위원회 소속 의원 21명 중 17명이 ‘외고 손보기’에 찬성하고 있어 이 개정안은 어떤 형태로든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공부 잘하는 애들은 성적 제한이 있는 자립형사립고와 자율형사립고에 몰린다고 걱정할 사람들을 위해 정 의원은 홈페이지에다 자율형사립고 역시 궁극적으론 선(先)지원 후(後)추첨으로 가야한다고 못 박았다. 대입 내신 반영이 강화되면 사교육이 급증한 전례대로 내신 경쟁을 우려하는 사람들을 위해선 9등급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바꿔야 한다고 밝혀놓았다.
그는 ‘외고 개혁안 Q&A’에서 외고 전환이 교육과 상관없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임을 분명히 했다. 즉 경제가 어려워졌는데 가장 부담이 큰 게 사교육비이고, 폭증의 원인은 대입제도와 외고이므로 외고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3년 전 ‘외고를 통제해도 입시경쟁과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책까지 썼던 이주호 교육부 차관이 같은 편인 걸 보면 정략적 이해관계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다. “우리 애는 수학 못해서 외고 못 간다”던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도 사심 없이 거들었길 바랄 뿐이다.
이 개혁안이 성공해 ‘만악(萬惡)의 근원’(역시 정 의원 표현)인 사교육이 없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만 전체 대학이 추첨 선발로 바뀌지 않는 한, 사교육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고 나는 본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때도 몰래과외가 성행했다. 남보다 앞서고 싶다는 열망을 정부가 막는 건 불가능하다.
이 정부는 학교정보 공개와 고교 선택제, 학교 다양화를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안타깝게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노동당 정부가 바로 그 정책들을 12년이나 펴고도 학력 격차 해소에 실패했다고 올 4월 지적했다. 선택을 많이 받은 학교는 지원자가 넘쳐 그림의 떡이었다. 기피 대상 학교는 문을 닫기는커녕 개선 지원금만 허비했다. 아무 과목이나 내건 다양화보다 대입이나 취업에 필수내용을 제대로 가르치는 학교가 중요하다는 평가다.
설령 이 정권이 대입 추첨제까지 강행한대도 모든 공공조직과 삼성 등 대기업이 종사자를 추첨 선발하지 않는 한, 대학생 및 일반인의 사교육은 늘어날 게 분명하다. 차라리 사교육금지법을 명문화하고 위헌 판결이 나기 전에 온갖 고시와 대학원 대비 학원 등도 뿌리를 뽑아야만 국민의 행복지수가 올라갈 터다.
미래경쟁력 포기가 중도인가
그리하여 이 정부가 열화 같은 국민적 지지 속에 정권 재창출에 성공해도 다음이 더 문제다. 미래세대의 학력을 하향 평준화한 ‘대못’은 세종시보다 깊게 남기 때문이다.
교육의 질이 높아야 개인은 계층 이동을 하고 국가는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뽑기 세상이어서야 누군들 힘들게 애쓸 이유가 없다. 일류대뿐 아니라 일류고를 향한 경쟁은 어디나 있고 또 필요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는 일류고를 나온 30대 6335명을 연구한 결과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보다 대학입학 때까지 고교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했는지가 장래 수입을 결정한다”고 논문에서 밝혔을 정도다.
그래서 하와이의 명문사립학교를 나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금 교원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진 공교육과 전쟁 중이다. 수만 달러를 내는 미국 사립학교의 학생들도 시간당 250달러씩 하는 수능(SAT) 과외를 받지만 우리 같은 사교육과 사립학교 죽이기는 없다. 스웨덴에선 1990년대 경제위기 타개책으로 우파 정부가 경쟁력 키우는 사립학교 설립을 허용했고 뒤이은 좌파 정부는 학비지원을 100%로 확대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파 정부는 지지율에 눈멀어 잘하고 있는 사립학교부터 대못질할 태세다.
있는 사람들은 자식 유학 보내면 그만이다. 그만한 능력은 없어도 어떻게든 자식 교육은 잘 시키고 싶다는 국민을 위해 외고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 해외 인턴을 가려 해도 영어가 안 돼 못가는 대졸 백수가 수두룩한 판국이다. 모든 학교를 외고화하면 되레 사교육이 줄어들 판에 배신당한 기분이다.
세계화와 지식기반경제는 뒤집히지 않았는데 정부가 경쟁력 있는 엘리트 교육을 뒤집는 것도 자손만대에 죄짓는 일이다. ‘머리’는 모자라고 눈만 높은 나라에 투자가 늘고 일자리가 쑥쑥 생길 리 없다. 내 자식은 일류고 못 나와 수월성 못 길렀지만 누군가가 보통 자식 만 명, 십만 명을 먹여 살리려면 엘리트 교육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