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韓流 살찌울 새 미디어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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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일 20시 00분


나는 TV 연속극을 거의 보지 않는 편이었다. 평소 똑똑해 보이는 아줌마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소파 위의 감자(couch potato)’처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딱하게 여겼다. 그런데 요즘 집사람 곁에서 KBS2의 ‘아이리스’를 거의 거르지 않고 시청한다. ‘아이리스’는 속도감이나 스토리의 전개에서 내가 알던 기존 드라마와 달랐다.

‘아이리스’는 한류(韓流)스타 이병헌과 ‘얼짱’ 김태희를 중심으로 한 호화 캐스팅에 헝가리와 일본에서 해외 촬영을 하느라 제작비 200억 원가량을 들였다. 방송계에서는 ‘아이리스’가 일본에서 대박을 터뜨리지 못하면 ‘태왕사신기’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430억 원을 들여 ‘태왕사신기’를 찍은 제작사는 한때 배우들에게 출연료를 지급하지 못할 만큼 자금난을 겪었다.

방송사들은 드라마 제작사에 회당 실제 제작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000만∼1억2000만 원을 지급한다. 제작사들은 “탤런트 출연료와 작가 원고료가 크게 올랐지만 방송사에서 지급하는 제작비는 같거나 줄어들었다”고 울상이다. 지상파 방송 PD 출신의 프로덕션 사장 K 씨는 “지상파가 우월적 지위에서 제작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며 “지상파의 독과점 구조를 깨야만 콘텐츠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콘텐츠 산업 고사시키는 지상파

지상파 방송사들은 드라마의 70∼80%를 외주 제작사에 맡기면서도 고액 봉급을 받는 제작 인력을 줄이지 않는다. 방송사의 고비용 구조가 외주 제작사들에 전가되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는 투자비가 많이 드는 고(高)위험 고수익 모델이다. 새 미디어법에 따라 생길 채널은 알뜰한 운영으로 한류산업과 공생하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지상파 독과점으로 인한 폐해는 뉴스 쪽에서도 심하게 나타난다. 일부 방송이 편향된 시각으로 생산하는 뉴스는 사회적 갈등비용을 키우고 있다.

작년 촛불시위 때 경찰이 ‘명박산성’을 넘어서는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쏜 적이 있다. 방송 뉴스는 물대포의 위험성에 관해 다섯 꼭지 여섯 꼭지를 쏟아냈다. 시위대가 명박산성을 넘어가 청와대로 진격하고 정부청사와 미국대사관을 점거했을 경우의 국가 혼란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광우병 쇠고기’에 관한 특집과 보도는 왜곡 과장의 표본일 것이다. 거의 선동에 가까운 방송이 아무런 걸러지는 과정 없이 송출돼 우리 사회는 작년 석 달 동안 엄청난 사회적 코스트를 치렀다.

뉴스 채널의 다양화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보도의 품질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기자들을 다수 확보한 전통 있는 신문사들이 뉴스 보도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민주당의 새 미디어법 반대투쟁은 미디어 산업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에서 비롯됐다. 관련기술의 발전으로 매체 간 칸막이는 사라지고 텔레비전 신문 통신 인터넷 케이블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다. 미디어는 세계를 향해 한류를 발신(發信)하고 먹을거리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문화산업이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계기로 미디어법을 둘러싼 논란을 접고 한국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새 틀을 짤 때다. 새 미디어는 특정 방송의 대항마가 아니라 21세기를 이끌고 갈 문화산업의 총아가 돼야 한다.

새 미디어법은 방송시장에 자유경쟁 체제가 도래함을 의미한다. 권력의 강제가 아니라 시장의 힘으로 일부 지상파 방송의 방만한 경영을 구조조정할 수 있다. 정부여당이 종편 선정을 신문에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SBS가 출범하던 때와는 시장 상황이 판이하다. 새 미디어는 풍랑이 거친 ‘레드 오션’으로 뛰어드는 일대 모험이다.

독과점 깨고 자유경쟁 새 틀 짜야

정치권 일각에서 6월 지방선거 이전에 종합편성 채널 선정을 부담스러워하는 시각이 있는 모양이다. 미디어법은 국회 통과 과정에서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른 극한투쟁으로 파행을 겪었다. 종편 선정 절차에서는 정략(政略)을 배제하고 글로벌 미디어 산업 육성이라는 입법취지에 충실해야만 한다. 이를 망각하고 정치공학적 계산으로 오염시킨다면 선정 후 더 큰 후유증이 따를 것이다. TV의 자유경쟁 체제 도입은 지금 시작해도 선진국에 비해 너무 늦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허허벌판에서 제철 조선 정유 같은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후손을 위한 먹을거리를 만들었다. DJ 하면 벤처산업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MB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미디어 산업을 키운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새 채널의 탄생 과정에서 어떻게 문화산업의 틀을 짜주느냐에 달려 있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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