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박영균]지하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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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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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를 마시고 나서 머리가 아프면 가짜 양주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국세청이 해마다 단속하지만 가짜 양주는 독버섯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국세청은 가짜 양주를 근절하기 위해 첨단 정보기술(IT)을 주류 유통에 도입했다. 지난달부터 서울 강남 지역에 출고되는 양주병 마개에 전자칩을 붙여 소비자들이 휴대전화로 진품 여부와 출고 일자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내년에는 서울시 전역에서, 2012년에는 전국으로 확대해 의무화한다.

▷모든 양주 병뚜껑에 250원짜리 전자칩을 붙이면 소비자들이 가짜에 속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양주 1병을 정상적으로 팔면 부가가치세 특별소비세에 종합소득세까지 술값보다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가짜 양주나 세금계산서 없이 무자료 거래를 하면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수 있다. 술집 주인이 어떤 거래에 마음이 끌릴지는 뻔하다. 미국 국세청(IRS) 분류에 따르면 가짜 양주는 ‘불법 지하경제’이고, 무자료 양주는 세금을 내지 않는 ‘비공식 지하경제’다.

▷국내 양주시장 규모는 약 5400억 원, 세금까지 합치면 연간 1조 원에 이른다. 이 중 20%를 지하경제로 보면 약 2000억 원어치가 세금을 내지 않는다. 이론상 가짜 양주, 매춘, 도박, 마약, 뇌물, 불법 고액과외 등 지하경제를 다 합치면 전체 규모가 나온다. 국정감사 때 차명진 의원(한나라당)은 국내총생산(1000조 원)의 27%인 270조 원 규모의 지하경제에서 한 해 54조 원의 세금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도 재정적자가 심했던 1980년대에 지하경제를 줄여 세수를 늘리자는 주장이 나온 적 있다.

▷미국의 L 파이기 교수는 지하경제를 “일반적인 공식 경제통계로는 파악되지 않는 모든 경제활동”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집을 살 때 세금을 적게 내려고 쓰는 다운계약서나 주부의 가사노동도 지하경제에 속한다. 변호사나 의사에게 영수증 없이 낸 돈도 마찬가지다. 카드깡 업자와 결탁한 세무공무원이나 검찰의 압수수색을 당한 국세청 고위 간부 부인의 갤러리도 지하경제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국세청이 지하경제를 끌어내 세수를 늘리겠다고 한다. 지하경제와의 전쟁이 실속 없는 호언장담으로 끝나지 않고, ‘유리알 지갑’뿐인 국민의 세금부담도 줄여주었으면 좋겠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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