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지상파에 공급하는 프로덕션의 대표가 민주당 전 의원 A 씨에게 물었다. “미디어법을 왜 반대합니까? 채널이 늘어나면 우리(프로그램 제작자)도 좋지만 민주당도 여러 군데서 홍보할 수 있지 않습니까?” A 씨의 답은 이랬다. “보수 신문이 방송을 하면 민주당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나올 겁니다.”
윤석민 서울대 교수가 조선일보 칼럼에서 쓴 대로 “질기고 질기게도” 미디어법에 태클을 걸려는 민주당과 언론 좌파들의 속을 A 씨의 말로 엿볼 수 있다. 하긴 민주당 의원 중 상당수가 열린우리당 집권 시절에는 이른바 ‘언론개혁’이라며 보수 신문을 옥죄었다. 시장점유율을 제한한 신문법이 그랬고, 신문발전위원회와 신문유통원은 친노(親盧) 마이너 신문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였다.
당시 그들은 여론 다양성을 제고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조치들이 독자의 환영을 받았다면 마이너 신문들은 지금쯤 달라졌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뭔가?
신문산업은 뉴미디어 해일을 맞고 있다. 종이 매체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하지만 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저널리즘은 그 해일을 날개로 삼아 새 전성기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서 신문이 영상과 더불어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길(매체 겸영 등)을 모색하는 것은 ‘소통 산업’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일부 마이너 신문은 민주당에 발맞춰 미디어법이 ‘조중동 방송’을 낳을 것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그 주장이 지지를 받는다면 그들도 미디어법이 만든 시장에 들어와 경쟁하면 될 텐데 한사코 안 된다고만 한다.
이들은 또 그 방송이 우파와 자본의 논리만 대변할 것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참으로 시청자와 독자를 무시하는 소리다. 그런 방송을 한다고 치자. 그러면 시청자는 바보인가? 채널이 100개도 넘는 시대에 시청자는 1초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리모컨을 눌러 떠난다. 이런 시청자에게 특정 이념만 내세우는 방송은 기본을 포기한 것이다. 이미 레드 오션인 방송 사업에 수천억 원을 투자하며 그 이상의 새 길을 모색하는 매체가 그렇게 한다면 바보 같은 짓이다.
신문과 방송의 겸영은 세계적인 추세다. 문자와 영상이 결합하는 미디어 진화 단계에서 매체 간 칸막이는 낡은 패러다임이다. 품질이 문제이지만 인터넷이 매체로 자리 잡은 이유도 문자와 영상이 결합한 덕분이다. 메이저뿐만 아니라 마이너 신문들도 현재 그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미디어법이 문제인가?
언론노조 등 언론 좌파들은 디지털TV 전송방식을 둘러싸고도 발목을 잡았다. 1997년 결정한 미국식이 그들의 반발로 4년간 묶였다. 미국식과 유럽식은 장단점이 있으며 단점은 기술 발달로 개선될 수 있다(현재는 개선됐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마이너 신문들은 노조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했고, 시장 독과점에 안주하려는 지상파들도 그것을 뒷받침했다.
미디어법 논란은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마무리됐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후속 조치에 들어갔다. 민주당과 마이너 신문들이 다시 발목 잡기에 나섰다. 컨소시엄 참여 기업에 대한 으름장도 나온다. 디지털 방식 사례가 준 교훈과 매체 환경 변화의 세계적 추이로 보면 그 태클은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 미디어의 글로벌 경쟁력이 미디어법의 과제이지만 그걸 갖춘다 하더라도 독자와 시청자를 살피지 않은 콘텐츠를 내보내는 것은 망조다. 그런 매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매체 시대의 수용자와 매체 산업의 변화에 눈감은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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