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점차 문화와 역사가 깃든 품격 있는 도시로 복원돼 가는 중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서울 청계천변, 중구 삼각동 22 일대에도 자그마한 시민공원이 또 하나 조성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곳이 지난날 우리 신문화의 요람이요, 국권 회복의 원대한 계획을 모의하던 신문관(新文館)과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있던 자리이다.
아담한 한식목조 2층이었던 이 유서 깊은 건물은 1969년 4월 27일까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리던 군사정권의 모 인사에 의해 헐려 없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청계천 남쪽에 이면도로, 즉 을지로 입구에서 청계초등학교 뒷담을 지나 다시 청계천 둑길과 합쳐지는 약 170m의 삼각동 뒷길을 확장하는 데 이 건물 전면이 1m가량 저촉된다는 얘기였다.
도하 각 신문에 이 건물을 사적(史蹟)으로 지정해서 영구 보존해야 한다는 명사의 시론과 논설이 연일 대서특필됐으나 끝내 헐리고 말았다. 월탄 박종화 선생을 비롯하여 이희승 유광렬 진학문 유봉영 조용만 선생이 건물의 보존과 문화유산 지정을 호소했고 몇 분은 시장실을 찾아가서 직접 탄원을 했지만 냉대만 받는 수모를 당했다.
신문관과 조선광문회가 어떤 곳이었기에 그토록 보존하려고 애를 태웠는가. 신문관은 100여 년 전, 우리의 국력과 국세가 날로 쇠퇴해 가는 원인이 신문명의 도입과 신문화 건설의 후진성에 있음을 절감하고 육당 최남선이 거금을 들여 최신 활판 인쇄시설을 도입해 최초의 근대적인 월간잡지 ‘少年(소년)’을 발행한 곳이다. 이후 수많은 잡지와 계몽도서를 간행해서 이 땅에 근대문명의 횃불을 들어 올렸던 곳도 이곳이요, 18세 소년 최남선이 최초의 우리 근대시 ‘海(해)에게서 少年에게’를 쓴 곳도 바로 여기였다.
한편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하자 뜻있는 선비가 비분강개하여 혹은 자결로, 혹은 국외 망명으로, 혹은 열혈 순국으로, 혹은 낙향 은둔으로 애국애족의 정신을 불태웠다. 이것이 단기적으로 국민의 자각과 분발심을 고취하는 움직임이었다면 장기적인 국권 회복의 비전을 제시하고 실의에 빠진 국민을 향해 우리의 정신과 역사 언어 문화의 일대 부흥운동을 일으키던 곳이 조선광문회다.
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우국지사가 총망라해서 결성한 조선광문회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된 박은식, 도산 안창호 선생을 비롯하여 주시경 장지연 권근 이승훈 김교헌 고휘동 이규영 김두봉 최남선 진학문 권덕규 한용운 권상로 정인보 김성수 송진우 남궁억 안채홍 문일평 양기탁 선생 등 50여 분이 적극 동참했다. 겉으로 내세운 목적과 설립 취지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귀중한 고전 희귀본을 수집 복간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등 일견 순수 학술 문화사업 같았으나 실제로는 비장한 민족정신의 일대 각성운동이었다.
1919년 2월 초, 처음으로 3·1운동을 발의한 곳도 이곳이요, 육당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구상한 곳도, 선언서의 문선·조판을 한 곳도 이곳이었으니 그야말로 숨 막히던 근대 우리 역사의 현장이 바로 같은 건물 아래층과 위층에 있던 신문관과 조선광문회다. 서울이나 지방 모두 옛 동네 뒷골목까지 주민의 정서가 깃든 곳을 찾아 원형을 복원하거나 보존하자는 운동이 활발한데 하물며 우리 근대사 속에 이처럼 깊고도 엄청난 사연이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을 지금 복원하지 않는다면 후손이 오늘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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