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함정임]수고했다, 그리고 수고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14일 03시 00분


현준에게. 11월 13일 빗소리에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창가로 가니 세상은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전날 전국을 휘감았던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화염(火焰)을 말끔히 씻어내기라도 하듯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현준아, 유리창에 맺혔다가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나는 너를 생각했다.

너는 지금쯤 세상에서 가장 깊은 단잠을 자고 있겠지. 수능 전날, 나는 너에게 수십 번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고, 네 엄마에게 짧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수고했다, 현준아. 수고했어요, 현준 엄마. 사실 그때 너는 수능을 앞둔 마지막 밤이었기에 나는 “끝까지 수고해라. 최선을 다하길 빈다”고 전하고 싶었으나 ‘수고했다’는 과거형 종결어미를 쓸 수밖에 없었지. 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나는 수고라는 말과 의미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수능을 앞둔 학생에게 피해야 할 말, 해주면 좋은 말을 언론 매체마다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지만 나는 나만의 말, 그리하여 너만을 위한 말을 꼭 찾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오랜 시간을 들여 고심하며 찾아낸 말이 ‘수고했다’일 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고작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던질 수밖에 없어서 만족스럽지 못했고, 급기야 나는 우리말 국어사전을 찾아들었다. ‘수고’란 사전에는 ‘일을 하느라고 힘을 들이고 애를 씀’이라고 나와 있더구나.

인간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평생의 업(業)으로 삼고 사는 작가지만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늘 참담한 지경에 빠지곤 한다. 정작 마음을 표현하려고 할 때 말은 얼마나 옹색하고, 무력한지. 네가 걸어온 험난한 고3의 길을 어깨너머로나마 옆에서 지켜보아온 나였기에, 또 네가 걸어온 그 모진 길을 곧 이어 내 아이도 걸어가야 하기에 나는 어느 때보다도 말의 한계에 부닥쳤다. 불안과 좌절과 부담으로 얼룩진 고3의 시간을 어떤 격려와 위로의 말로 감싸줄 수 있을까.

오래전 일이다. 지금처럼 11월이었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로 지금과는 다른 입시 세계를 경험했지. 네가 그랬듯이 나도 오직 그날, 학력고사가 치러지는 그 한 날을 위해 1년, 아니 3년을 매진했다. 그런데 시험으로부터 해방되던 그날 밤, 나는 불행하게도 너처럼 단잠에 빠지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여야 했다.

시험을 치르고 나와서 바라본 하늘은 금세 무너져버릴 듯이 음울하고, 땅은 금세 꺼져버릴 듯이 위태로웠다. 꼭 그때의 내 마음처럼. 시험만 끝나면 두 발 쭉 뻗고 천국의 잠을 자리라 갈망했는데, 정작 세상은 나에게 불안과 불면의 밤을 선물로 안기고는 모르쇠를 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수없이 보아온 모의고사보다 가장 낮은 점수를 그날 받았다. 그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고, 그것으로 당연히 나의 미래란 없을 것 같았다.

현준아, 11월 13일 이른 새벽, 고요하게 세상을 적시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너를 생각했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네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을 자고 있기를 빌었고, 혹여 오래전 나처럼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진리를 오늘의 내 삶을 증거로 전해주고 싶구나. 오래전 나의 잠을 앗아간 그 춥고 시렸던 11월의 밤을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사랑한단다.

현준아, 수능이 끝난 밤, 나는 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창가를 수십 번 서성거리지도 않았다. 이 비 그치면, 깊은 잠을 자고 난 너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마음속에 궁굴린 한마디 말을 건네고 싶다. 수고했다고.

함정임 소설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